저지 드레드(Judge Dredd)는 1970년대 후반 2000 A.D.라는 잡지에 연재된 코믹스 캐릭터를 기반으로 합니다. 작중 설정에 따르면 22세기 미국 서부지역은 핵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어 '저주받은 땅'으로 불리게 되고, 동부지역에는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들며 4억명이 넘는 인구가 밀집된 거대도시가 형성되죠. 심각한 인구밀집과 실업문제, 전시 개발된 사이보그와 핵전쟁으로 인한 돌연변이, 마약에 총기까지 갖가지 문제를 떠안은 이 거대도시는 온갖 심각한 강력범죄로 몸살을 앓게 되고, 치안을 회복하기 위해 범죄자의 체포는 물론 즉심판결과 처형 권한까지 허락된 강력한 경찰력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저지(Judge)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 최고이자 가장 무자비한 저지가 바로 메가시티-원 13구역에 배속된 드레드(Dredd)죠.
뭐 "내가 바로 법이다" 따위를 지껄이며 눈에 띄는 범죄자들을 거의 대부분 즉결심판해버리는 저지는 어찌보면 우리가 이제껏 힘들게 이룩해온 사법체계의 중립성과 민주적 절차 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꽤나 파시즘적인 설정이지만, 원작 자체가 액션에 비중을 둔 성인 코믹스이기 때문에 굳이 머리아프게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작중 메가시티-원의 모습은 정말 이런 파시스트 경찰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싶을만큼 아비규환 상태고요.
잘 알려진 것처럼, 저지 드레드는 95년 실베스타 스탤론에 의해 한 번 영화화된 적이 있습니다. 상당한 제작비가 투입된 블록버스터였고, 인상적인 액션장면들도 몇 있었지만 스토리 자체가 워낙 시원찮았던 통에 흥행에선 망했습니다. 스탤론의 흑역사 작품 중 하나;; 또 원작에서 절대 헬멧을 벗지 않는 드레드의 설정과 달리 스탤론이 런닝타임 대부분에서 맨얼굴로 돌아다니는 등 원작 팬들을 실망시키는 부분도 많았고요.
그리고 드레드가 17년만에 스크린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이 영화입니다.
스탤론의 95년작에 비해서는 많은 점들이 바뀌었습니다. 일단 제목부터 '저지 드레드'가 아니라 그냥 '드레드'죠.(하지만 우리나라엔 저지 드레드 3D로 소개). 드레드가 작품 내내 단 한번도 헬멧을 벗지 않는 등 원작의 설정에 좀 더 충실해졌고, 검은색 쫄쫄이 스판에 거대한 어깨장식만 들어가있던 코스튬은 현실적으로 리파인되었습니다.(본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 중 하나) 볼거리는 화려하지만 속은 비어있는 블록버스터였던 95년작과 달리, '드레드'는 시종일관 웃음기 없고 스케일도 작지만, 밀폐된 거대빌딩에서 상당히 짜임새있는 액션을 보여주는 정통 액션물입니다.
일단 이 작품은 긴장감이 상당히 좋습니다. 75,000명이 거주하는 200층 높이 거대 아파트에 갇힌 채 최상층의 적 보스를 상대하러 가는 설정은 밀폐된 공간에서 제한된 장비를 사용한 사투라는 점에서 다이하드 1편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도 있고, 또 많은 분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레이드 : 첫번째 습격'과 비슷한 면이 많지만 어쩄든 꽤 매력적인 건 사실입니다. 그리고 3D를 활용한 공간감이 굉장히 좋은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2D로 봐서 이건 평가 불능;; 어쨌든 근미래 SF 액션물을 다루면서 밀폐된 공간이란 설정을 잘 활용해 제작비 많이 드는 특수효과나 CG 등을 최대한 배제하고도 썩 괜찮은 템포와 긴장감을 가져간다는데서 연출의 힘이 빛납니다.
액션 장면을 살피면, 화끈하게 가느냐 가족과 함께 볼 수 있는 SF로 가느냐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95년작과 달리 2012년 '드레드'는 확실히 성인관객으로 타겟을 정한 듯 합니다. 액션이 굉장히 잔혹한 편이죠. 총알이 얼굴을 뚫고 지나가거나, 피부가 벗겨진 시체가 200층 높이에서 떨어져 말그대로 피떡이 되어버리거나, 역시 200층 높이에서 얼굴부터 바닥에 떨어져 피를 뿜으며 뭉개지는 모습 등이 여과없이 화면에 등장합니다. 총기 타격감도 상당히 묵직한 편이라 유혈낭자한 액션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환호할만한 작품입니다.
인물들도 꽤 매력적인 편입니다. 사실 주인공인 드레드(칼 어번)는 별로 재미없는 인물입니다. 항상 헬멧을 쓰고 다녀 표정이 없는데다가, 터미네이터만큼이나(아니 터미네이터보다도 더욱) 무감정하거든요.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원칙과 형법 규정만이 빼곡하게 들어있으며, 이를 위반한 상대를 무자비하게 심판하는데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책감도 없는 인물이죠. 그나마 법을 수호하는 저지가 되었으니 망정이지 갱단에서 길러졌다면, 조직의 명령에 절대복종하며 누구든 거리낌없이 쏴죽였겠죠.
하지만 여기에 매력적인 외모의 신참 카산드라 앤더슨(올리비아 썰비)이 더해지며 훨씬 입체감을 줍니다. 신입 저지로 최종평가를 받기 위해 드레드와 동행했다 사건에 휘말리게 된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 썩어빠진 거대한 도시를 조금이나마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희망을 간직하고 있고, 법 집행의 엄정함과 인간으로서의 연민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초능력에 방해가 된다는 구실로 혼자 헬멧을 쓰지 않기 때문에, 드레드의 얼굴에서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감정선이 표정을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다.
악역 마-마(레나 헤디. '왕좌의 게임'의 라니스터 여왕님!)는 꽤 매력적인 설정의 악역입니다. 지금은 메가시티-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종 마약 '슬로모'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한 범죄의 여왕이지만, 또 한 때 그녀는 이 가혹한 도시의 가녀린 피해자였기도 하거든요. 저지 두 명 잡자고 한 층 전체 주민을 학살하는 등 동정할 가치가 없는 무자비한 여자지만, 그래도 웬지 이 빌어먹을 도시에 살지 않았다면 이 지경에 이르진 않았을 거란 기묘한 연민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굉장히 퇴폐적인 매력을 뿜어내긴 하는데 작중 활약이 좀 적다는게 아쉽습니다.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긴 하지만 그래도 단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아쉬운 점을 약간 살피면,
일단 연출을 통해 최대한 메꾸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제작비의 한계가 드러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뭐 스케일이 거의 TV 소품 수준이거든요. 초반의 도시 풍경도 좀 더 황폐하고 어두운 느낌이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냥 실제 도시에 CG로 커다란 건물 몇 개 그려놨다는게 약간 티나고, 초반의 소박한 카 체이스나(왜 구형 이스타나를 타고 추격전을...=_=) 드레드가 출동할 때 주변의 다른 경찰 차량(픽업트럭에 그냥 뚜껑 올려놓은...=_=;;)들은 헛웃음마저 줍니다. 95년작 같은 블록버스터까진 안 바라더라도 그냥 제작비로 백만 달러만 더 있었으면 훨씬 화면때깔이 좋아졌을 거란 아쉬움이 들더군요.
액션장면도 잔혹함은 마음에 드는데 좀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드레드는 거의 작품내내 허리 꼿꼿이 펴고 뚜벅뚜벅 걸어다니며 방아쇠를 당겨대는데, 이렇게 할거면 '인랑'의 프로텍트 기어처럼 왠만한 소화기는 몸으로 받아낼만한 방호력을 주든지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엄폐에 신경써서 허리 숙인 채 뛰어다녀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저지 코스튬은 사실 그냥 폼나는 가죽재킷일 뿐이라(저지끼리 싸울 때는 law-giver의 화력이 워낙 막강해 방탄복도 뚫어버리나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일반 소총에도 그냥 뚫리더군요;; 쫄쫄이 스판보다 외양만 업그레이드된 거냐?) 드레드가 저러고 다니는게 꽤나 개폼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악역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아쉬움입니다. 특히 최종보스 마-마는 너무 허무하게 퇴장하죠. 가냘픈 몸매의 마-마가 중무장한 드레드와 격투를 벌이는 것도 이상했겠지만, 드레드를 궁지로 몰아넣을만한 마-마의 강력한 보디가드-뭐 95년작에 나왔던 로봇이라든지 하다못해 한쪽 팔을 사이보그로 갈아치운 2m 짜리 근육덩어리라든지-가 있었다면 마지막 전투가 좀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드레드를 그나마 몰아붙인 게 매수된 저지들인데, 이것도 사실 그치들 실력이라기보단 드레드가 탄창이 떨어진 탓에 좀 고전한 것 뿐이죠...=_=
마지막으로 아쉬운 점은 배우입니다. 앤더슨이나 마-마나 다른 배우들은 모두 훌륭합니다. 주인공 드레드가 문제에요. 드레드 역의 칼 어번은 물론 좋은 배우입니다. 하지만 원작의 드레드와 썩 어울리진 않죠. 어차피 헬멧으로 얼굴 절반은 가린데다 워낙 무감정한 캐릭터라 뛰어난 연기력도 그다지 필요없고, 대사도 나지막하게 으르렁거리거나 고함치는 것 뿐인데 차라리 칼 어번 대신 좀 더 드레드의 외양을 닮은 배우(크고 강인한 사각턱에 덩치도 좀 더 큰 근육질의)를 캐스팅하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체격도 평범한데다 턱이 작으니까 드레드같지가 않아요;;
머 몇 가지 아쉬운 점들도 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레드'는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원작 코믹스의 설정을 잘 지키면서도, 원작에 연연하지 않은 채 액션만으로 승부하는 작품이죠. 유혈낭자한 액션의 둔탁한 질감만큼은 최근 영화 중 최고수준으로 꼽을만 합니다. 본편이 성공했다면 다음 작품에선 좀더 나아진 화면 때깔과 함께 SF적인 요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흥행은 실패한 듯 하여 아쉽습니다. 워낙 제작비가 저렴했던 작품이라 본전은 뽑았다고 하니 그나마 속편을 기대할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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