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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주먹왕 랄프(Wreck-it Ralph, 2012)



아이들도 물론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었지만, 8비트 게임기 세대의 추억을 가진 80년대생 키덜트에게 더 큰 선물로 느껴졌던 작품입니다. 픽사와 디즈니가 공식적으로 합병된 후 '메리다와 마법의 숲'에 이어 두번째 작품인데, '메리다와 마법의 숲'이 정통 디즈니의 영향이 강했다면(뭐 크게 보자면 디즈니의 역대 공주 시리즈에 넣을 수 있겠죠), '주먹왕 랄프'는 픽사의 영향이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작품이고 특히 '토이 스토리'의 게임버전이라고 해도 크게 할말 없을만큼 유사한 느낌이 듭니다. 


이게 단점이란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먹왕 랄프'에는 픽사가 '토이 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다져오고, '월-E'와 '업'을 통해 어떤 경지에마저 올랐음을 보여준, 사소한 물건에 얽힌 추억을 통해 어른들마저 눈물 쏙 뺄만큼 감정선을 자극하는 솜씨가 고스란히 녹아있고 이는 오히려 작품의 큰 장점입니다. 


주인공 랄프는 '다고쳐 펠릭스(Fix-it Felix)'란 30년 된 고전게임의 악당입니다. (Fix-it Felix가 '다고쳐 펠릭스'라면 Wreck-it Ralph도 '다부숴 랄프'로 번역되는게 더 뜻도 잘 통하고 매끄러웠을텐데 말이죠.) '다


고쳐 펠릭스'는 고전게임 '렘피지(Rampage)'의 반대버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게이머가 괴물이 되어 건물을 부수는게 아니라, 랄프가 날뛰며 부숴놓은 건물을 마법의 망치로 고치는 게임이죠. 랄프가 건물을 온통 부수어놓기 전 펠릭스가 모두 고치는데 성공하면 스테이지는 클리어되며 펠릭스는 주민들로부터 감사의 메달을 받습니다. 랄프는 어떻게 되냐고요? 주민들이 힘을 합쳐 랄프를 옥상에서 진흙구덩이로 내던져버리죠. 그게 랄프의 삶입니다. 모든 영광은 펠릭스가 독차지한 채 주민들에겐 괴물취급을 당하고 옥상에서 내던져진 뒤 홀로 쓸쓸한 자신의 집-쓰레기장으로 돌아가죠. 


더 최악인 것은, 랄프가 진짜 악당이 아니라는 겁니다. 게임속 다른 악당들처럼, 그는 그저 악당 배역을 맡은 평범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저 악당 배역을 맡았다는 이유로 그는 항상 미움받고 외톨이가 되어야 합니다. 점점 쌓여가는 불만 속에 랄프는 우울해하고, 랄프를 빼놓은 채 벌어진 게임발매 30주년 기념파티에 결국 사건이 터집니다. 초대받지 못했지만 억지로 파티에 참석하려던 랄프는 그만 파티를 망쳐버리고, 영웅의 상징인 메달이라도 따오지 않는 한 결코 펜트 하우스에 초대받을 수 없다는 말을 듣죠. 이 말에 화가 난 랄프가 메달을 찾기 위해 다른 게임 속으로 떠나며 그의 모험은 시작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랄프는 '히어로즈 듀티' 게임에서 그토록 바라던 메달을 획득하지만 그만 '슈가러시'란 이름의, 마리오 카트에 온갖 달콤한 간식들을 섞어 여아용으로 리메이크한 듯한 레이싱 게임에 불시착해버리고 힘들게 얻은 메달조차 '바넬로페'라는 건방진 꼬맹이에게 빼앗깁니다. 화가 난 랄프는 바넬로페를 뒤쫓지만 실은 바넬로페 역시 버그 때문에 누구에게도 선택받지 못한 외톨이이며 레이스에 출전하기 위해 메달이 필요했던 거죠. 랄프의 메달은 이미 바넬로페의 출전료로 써버린 상황이고 되찾을 방법은 바넬로페가 레이스에서 우승하는 것 뿐입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싸웠던 둘이지만 이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거죠. 


'주먹왕 랄프'의 이야기는 사실 굉장히 치밀하다거나 참신한 편은 아닙니다. 모난 구석 없이 전형적인 디즈니 가족영화 스타일의 매끈한 스토리죠. 하지만 각자의 세계에서 따돌림당하던 아웃사이더들이 소박한 목표를 위해 힘을 모으는 모습만으로도 그냥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제가 원래 이런 거에 좀 약해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몇몇 장면에선 코끝이 찡할 정도에요...


'주먹왕 랄프'를 흥미있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요소는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입니다. 게임이란 환상의 세계를 다루고 있는만큼 이 작품에서는 현실을 벗어나 오직 애니메이션만이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한 원색의 색감과 환상적인 시각효과들로 화면을 수놓습니다. 온갖 달콤한 것들로 도배된 '슈가러시'의 세계를 구경하다보면 저절로 뭔가 커다란 아이스크림이나 파르페가 먹고 싶어질 정도에요. 굉장히 아기자기한 느낌이면서도 또 레이싱이나 액션 장면에선 박진감 넘치는 스펙터클도 볼 수 있습니다.  


'주먹왕 랄프'의 마지막 재미는 추억입니다. 이건 꼬마들보다는 오히려 저같은 키덜트들을 겨냥한 요소죠. 알만한 고전게임들을 패러디한 작중 게임들의 제목과 모습부터 시작해 작품 곳곳에는 고전게임에 대한 패러디 요소가 숨어있습니다. 알만한 캐릭터들의 까메오 출연도 반갑고요. 슈퍼마리오의 버섯부터 시작해 소닉과 팩맨, 록맨, 스페이스 인베이전 등이 까메오로 출연하며, 특히 스트리트 파이터에서는 악당 캐릭터인 장기에프(장기에프가 어째서 악당에?=_=;;)와 베가 장군부터 켄과 류, 잠시 스쳐지나가는 춘리와 캐미까지 등장해 깨알같은 재미를 줍니다. 


'주먹왕 랄프'는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캐릭터들도 매력있고 화면도 예쁘고 웃겨야 할 장면에선 확실히 웃길 뿐 아니라 액션 장면에선 스펙터클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픽사 특유의 정서-감동을 강요하며 쥐어짜는 게 아니라 어느새 자연스레 주인공에 동화되고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만드는-도 유감없이 살아있습니다. '호빗'과 같은 날 봤는데 오히려 '호빗'보다도 더 좋았어요. 픽사와 디즈니의 동거(아니 정식합병이니 이제 결혼인가요?)가 지금처럼만 이어진다면, 앞으로도 즐거운 애니메이션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됩니다. 


p.s. 1. 스트리트 파이터에서 항상 논란이 되는게 4천왕의 이름인데 잠깐 정리. 


스트리트 파이터 일본판에서 4천왕의 이름은 사가트(킥복싱하는 대머리 애꾸눈), 바이슨(흑인 복서), 발로그(가면쓰고 갈퀴손 휘두르는 스페인청년), 그리고 베가 장군입니다. 그런데 이걸 미국판에서 멋대로 바꾸어버렸고, 그것도 새이름을 지어준게 아니라 서로 이름을 바꾸는 바람에 혼란이 생겼습니다.  이유는 바이슨(흑인 복서) 때문인데 이녀석이 마이크 타이슨을 모델로 한다는 건 진작에 유명하죠. 이게 일본에선 별 문제가 없었지만 초상권 개념이 뚜렷하고 소송이 난무하는 미국에선 문제가 되었습니다. 딱 봐도 타이슨 패러디인데 이름마저 비슷하면 초상권 침해를 피할 재간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미국판에선 바이슨의 이름이 발로그로 바뀝니다. ...근데 이 발로그는 이미 가면 쓴 녀석 이름이란 말이죠. 졸지에 이름을 잃은 이녀석에겐 당장 새 이름이 필요했습니다. 그럼 바이슨과 발로그를 서로 바꾸면 될 것 아니냐? 사실 이게 가장 간단한 방법이죠. 근데 캡콤에선 무슨 생각이었는지 이름을 잃은 가면 녀석에게 베가란 이름을 주고, 역시 자기 이름을 내줘버린 장군님에겐 바이슨이란 이름을 붙입니다.(바이슨이란 이름이 가면쓴 녀석 이미지와 너무 안 맞아서 궁여지책이었단 말도 있음) ...바이슨(흑인 복서) 하나 때문에 졸지에 4천왕 중 사가트만 제외한 3명의 이름이 바뀌어버린 거죠. 


정리하자면, 


애꾸눈에 대머리 킥복서      ~ 일본판 : 사가트 -> 미국판 : 사가트(변동없음)

타이슨을 닮은 흑인 복서     ~ 일본판 : 바이슨 -> 미국판 : 발로그

스페인 출신 가면 쓴 갈퀴손 ~ 일본판 : 발로그 -> 미국판 : 베가

최종보스 장군님                ~ 일본판 : 베가    -> 미국판 : 바이슨  


p.s. 2. 작중 등장하는 게임 '슈가러시'는 무려 실제 게임으로 개발 예정이랍니다. 애초에 마리오 카트를 모티브로 한 게임이라 아류작 논란은 피해가기 어렵겠지만 화면 예쁜 것만으로도 일단 꽤 먹고 들어갈 듯. 그리고 예~전에 나왔던 디즈니 게임들(라이온 킹이라든지 알라딘)이 은근히 게임성이 괜찮았기 때문에 실제 게임으로 나온다면 꽤 기대됩니다. 특히 자동차 만들기 미니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