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외톨이 소녀가 있어, 엄마와 10년이나 만나지 못했습니다.
엄마는 소녀에게 철로 된 갑옷을 입혀놓고선 언제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옷이 닮아 없어지면, 틀림없이 엄마와 만날 수 있게 될 거야."
소녀는 필사적으로 옷을 벽에 문질러 닳게 만들었습니다.
마침내 옷을 닳아 없애고, 우유와 빵, 그리고 치즈와 버터를 갖고 엄마를 만나러 간 소녀는 숲속에 늑대를 만났습니다.
늑대는 소녀에게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우유와 빵, 거기에 치즈와 버터를 조금 갖고 있다고 대답하자, 늑대는 내게도 조금 나누어 주지 않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소녀는 엄마에게 줄 선물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늑대는 핀의 길과 가시밭길 중에서 어느 쪽으로 갈 것을 물어보았습니다. 소녀가 핀의 길로 가겠다고 대답하자, 늑대는 가시밭길로 뛰어가 소녀의 엄마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이윽고 소녀가 집에 도착했습니다.
"엄마, 문 열어줘요."
"문을 열고 들어오려무나, 잠겨있지 않단다."
... 늑대는 그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아, 소녀는 구멍을 통해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 배가 고파요."
"찬장에 고기가 있으니까 먹으렴."
그것은 늑대가 죽인 엄마의 살이었습니다.
굴뚝 위에 커다란 고양이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먹고 있는 건 엄마의 살이란다."
"엄마, 굴뚝 위에 고양이가 있는데, 내가 먹고 있는 게 엄마의 살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거짓말일게 뻔하잖니. 그런 고양이에게는 나막신을 던져주렴."
고기를 먹은 소녀는 목이 말랐습니다.
"엄마, 나 목이 말라요."
"냄비에 포도주가 있으니 마시려무나."
그러자 조그만 새가 날아와 갑자기 말했습니다.
"네가 마시고 있는 것은 엄마의 피란다. 엄마의 피를 마시고 있는 거야."
"엄마 굴뚝에 조가만 새가 있어서, 내가 엄마의 피를 마시고 있다고 말하고 있어요."
"그런 새에게는 두건을 던져 주거라."
살을 먹고 피를 마신 소녀는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어쩐지 잠이 와요."
"이쪽으로 와서 조금 쉬려무나."
소녀가 옷을 벗고 침대에 다가가자, 엄마는 두건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기묘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왜 이렇게 귀가 커요?"
" 그건 네 목소리를 잘 듣기 위해서란다."
"엄마, 왜 이렇게 눈이 커요?"
"그건 네 모습을 잘 보기 위해서란다."
"엄마 왜 이렇게 손톱이 길어요?"
"이게 없으면 너를 꼭 안을 수 없기 때문이란다."
"엄마, 왜 이렇게 입이 커요?"
"그래야 널 한 입에 잡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늑대는 이렇게 말하고서 소녀를 한입에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빨간 두건 이야기-
인랑은 오시이 마모루의 '견랑전설'을 바탕으로 하는 작품으로 작중 세계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견랑전설의 내용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작중 세계관에서 일본은 제 2차 세계대전 패전후 독일 군정(실제 역사와 다른 점인데, 여기에서 일본은 연합군에 가담했지만 주축군이 승리하며 독일 군정 치하로 나옵니다. 왜 미국이 아닌 독일이냐는 질문에 '독일 군복과 무기가 멋지니까!-ㅁ-!'라고 답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의 지배를 받으며 고도성장을 이루어가지만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빈부격차 발생과 사회개혁 요구 등으로 내홍을 겪으며 전국에서 시위가 잇따르는 상황입니다. 특히 강성 투쟁세력인 '섹트'(적군파를 모티브로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는 소규모 군대급의 화력을 보유한 채 곳곳에서 시위 선동과 테러행위를 벌이며 악명을 떨칩니다. 이런 섹트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수도경 특기대, 일명 '켈베로스'이며 그 중에서도 프로텍트 기어와 중기관총으로 무장한 돌입소대는 특기대의 상징이 됩니다. 특기대와 섹트는 도심에서 시가전 수준의 전투도 불사하며 끊임없이 서로의 피를 또다른 피로 씻어내는 숙적이 되죠. 민간인의 피해조차 괘념치 않는 특기대의 잔혹한 진압방식은 여론으로부터 비난받고 수도경과 자치경의 갈등을 불러일으키지만(수도경은 독일군정이 전후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자 주로 군 출신에서 차출해 만든 조직이고 자치경은 민간정부로 정권 이양 뒤 정상적인 공채로 선발된 경찰조직입니다. 특히 특기대 고위인물 중에는 전범급 군인도 상당수 포함되어있었죠.) 섹트의 테러행위에 맞선다는 명목 하에 정당화됩니다.
하지만 토사구팽이라 했던가요? 특기대의 활약과 온건화된 사회분위기로 인해 섹트는 점점 힘을 잃어가는데, 이는 곧 특기대의 위기로도 이어지게 됩니다. 강성한 섹트에 맞서기 위해서는 군대나 다름없는 화력을 보유한(심지어 자체적으로 장갑차와 항공소대까지 운영) 특기대가 꼭 필요했지만, 섹트가 사라진 뒤 특기대는 그대로 놔두기에 너무 위험한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죠. 그렇게 처절하게 싸워왔던 특기대와 섹트였지만, 실상은 자신들의 존립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적대적 공생관계였던 겁니다. 설상가상으로 특기대의 상급조직인 수도경에서조차 앞으로 조직통합을 앞두고 자치경과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는 특기대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으며, 특기대는 점차 궁지에 몰리게 됩니다.
견랑전설은 이런 배경 아래 특기대와 섹트의 싸움, 특기대를 모함하여 해체시키려는 수도경 공안부의 음모, 오히려 그를 역이용하여 수도경의 약점을 잡고 조직을 보전하려는 특기대 정보부의 역공작 등이 뒤얽힌, 꽤나 하드보일드한 정치물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면... 갖은 노력에도 결국 해체가 결정된 특기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 병력을 동원 봉기하여 경찰청을 무장점거한 채 최후의 전투를 벌입니다.(이 때 진압을 맡은 부대가 특기대로부터 훈련받은 자위대의 프로텍트 기어 시범부대라는 것도 아이러니죠. 파수견으로부터 길러진 군견이 첫 임무로 그 파수견을 사냥하는 상황...) 궁지에 몰린 개가 끝내 주인의 발뒤꿈치를 물어뜯은 거죠. 이 쿠테타에서 특기대는 전원이 사살되지만 토리베 소이치로, 토도메 코이치, 와시오 미도리 3인만은 특기대장의 명에 따라 탈출하게 되며 이후의 이야기는 실사영화 '지옥의 파수견'과 '붉은 안경'으로 연결됩니다.(참고로 이 두 영화는 저예산인데다가 전문배우가 아닌 성우의 대거 연기 기용, 오시이 마모루의 실험적 구성까지 어우러지며 참 이해하기 어려운 괴작이 됩니다;;)
음 소개하려는 작품은 인랑인데 앞에 다른 말이 너무 길었군요;; 하지만 견랑전설의 세계관을 알아두면 인랑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주저리주저리 했습니다. 인랑은 일종의 외전으로 볼 수 있는데, 견랑전설의 에피소드를 거의 그대로 차용한 것도 있고, 각색한 부분도 있고, 순수한 오리지널 구성도 뒤섞여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세계관의 정사로 볼 수 있는 견랑전설과 서로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지만, 설명이 불친절한 세계관만 이해하면 켈베로스 사가의 다른 작품들과 상관없이 독립된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인랑에서 또 하나의 특이점은 원작자 오시이 마모루가 2선으로 후퇴하고 히로유키가 감독으로 나서며 오시이 마모루와는 또다른 결을 보여준다는 겁니다. 오시이 마모루 자신이 워낙 외곬수다보니 본인 스스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잘 그려내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해 연출을 고사했다고 하는데, 이런 점에서 히로유키 감독기용은 신의 한수로 보입니다. 이미 공각기동대에서 오시이 마모루와 작업한 경험이 있는 히로유키는 오시이 마모루가 짜놓은 세계관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견랑전설의 하드보일드한 세계를 인랑에서 훨씬 개인적인 관점으로, 관계의 측면으로 풀어냅니다. 견랑전설이 피도 눈물도 없는 조직간의 이야기라면, 인랑은 그 조직에 속해있으면서 고뇌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된 거죠.
글 먼 처음에 인용한 빨간 두건 이야기(사실 이건 동화가 아니라 애들한테 함부로 나다니지 말로 겁주기 위해 만들어진 잔혹한 이야기죠.)는 인랑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볼 수 있습니다. 작중에서도 주인공인 케이와 후세를 통해 두번이나 인용되고요. 단순하게 생각하면 '켈베로스'(그리스 신화속 지옥문을 지키는 머리 셋 달린 파수견)라 불리는 특기대의 엘리트 대원인 후세는 늑대로, 섹트의 일원으로 폭탄을 배달하는 임무을 하지만 후세의 눈앞에서 자폭하는 일명 '빨간 두건' 소녀와 그 언니 케이는 빨간두건으로 치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냉혹한 포식자처럼 보였던 후세조차 죄책감과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인간이며, 자신이 속한 조직 앞에서는 지독히 무력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면이 드러날 때 이 해석은 흔들리게 됩니다. 인랑에서 조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의심받지 않는다는 이유로 폭탄 배달 임무를 맡으며 섹트에 이용되었던 소녀, 후세를 이용해 스캔들을 일으키려는 공안의 공작에 이용된 케이,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역공작을 벌이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쏴야 했던 후세까지 이들은 모두 조직을 거역할 수도, 그들의 손으로 벗어날 수도 없었던 무력한 '빨간 두건'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이대로 멀리 떠나버리자는 케이의 애원을 후세가 거부한 순간(뭐 애초에 도망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운명은 이미 비극적인 파국을 향해 내닫고 있었던 거죠. 인랑은 시종일관 쓸쓸합니다. 처음부터 비극이 예정되었던 후세와 케이의 사랑도, 그들의 짧은 도피 중 지나가는 거리의 모습도, 심지어 액션 장면에서조차도 그 과도한 잔혹함은 통쾌함이 아닌 음울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쓸쓸함은 영화가 끝난 뒤에도 한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여러모로 정말 뛰어난 작품입니다. 오시이 마모루의 세계관은 언제나처럼 탄탄하고, 감독을 맡은 히로유키는 오시이 마모루적이면서도 한층 섬세한 접근을 보여줍니다. 장인정신으로 유명한(...요즘 하는 거 보면 그나마 퇴색된 듯 하지만...ㅠ_ㅠ) 프로덕션 IG에서 정밀한 고증(심지어 등장하는 총기의 총염과 발사음까지 직접 사격해보며 테스트;;) 하에 일체의 CG를 지양하고 수작업으로 완성한 실사체 작화는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 최후의 역작으로 불릴만한 퀄리티를 뿜어내며, (지금은 칸노 요코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하지메 미조구치의 음악 또한 탁월합니다.
지금 일본애니메이션에서는 참 찾아보기 힘든 묵직함을 가진 작품입니다. 그리고 현재 일본 애니메이션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그냥 대중성 노리고 라이트하게 가거나 오덕들 노리고 미소녀 벗겨먹는게 태반이죠...-_-), 이 작품은 일본 애니메이션계 최후의 역작 중 하나로 남게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족한 리뷰 읽고 혹시 흥미가 동하셨다면 꼭 한번 보시길 바래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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