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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그래비티(Gravity, 2013)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영화는 SF라기보다는 재난 영화에 가깝고(사실 과학적으로 따진다면 태클걸 게 너무나 잔뜩인 영화죠...=_=;;), 굉장히 단순한 구조의 영화입니다. 등장하는 인물도 단 3명 뿐이며(그나마 1명은 극초반 탈락, 1명도 중도 탈락하니 사실상 산드라 블록의 모노드라마죠.) 굉장한 세계관이라든지 심오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도 아니에요. 런닝 타임도 90분에 불과하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환상적이고 강렬합니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힘이 있고, 느낌이 정말 좋아요. 어쩌면 최근 영화들 중 영화의 가장 순수한 목적-인간이 결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환상의 세계를 영상으로 구현한다는-에 가장 충실한 영화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래비티'는 반드시 IMAX로 봐야 할 필요성이 있는 영화입니다. 그것도 앞자리일수록 좋고요. 한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거대한 화면을 올려다볼 때 이 영화의 느낌이 가장 잘 살아나거든요. 영화의 오프닝 씬 - 거의 5분 동안 허블 망원경을 수리하는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일행과 우주의 모습을 360도로 빙글빙글 돌며 비추는 롱테이크 장면은 일종의 경이감마저 들만큼 압도적입니다. 이 영화는 우주의 모습을 이토록 멋지게 구현하고 관객들에게 정말로 우주공간에 떠있는듯한 경외감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가치가 있습니다. 


캐릭터를 따지자면, 맷 코왈스키의 캐릭터가 좀 사기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는데(어떤 상황에서도 여유롭고 심지어 스톤에게 자신을 놓도록 하고 홀로 우주공간으로 사라져가면서도 일말의 당황 없이 오히려 여유있게 그녀에게 농담을 던지며 앞으로의 탈출방법을 조언하는 부처님 멘탈), 이 캐릭터를 조지 클루니가 하니까 꽤 어울립니다;; 러시아 우주정거장의 탈출선에서 죽음을 기다리던 스톤 박사 앞에 갑자기 나타나는 장면에서는 분명히 스톤 박사의 환상이란 걸 머릿속으로 인지하면서도 왠지 조지 클루니니까 진짜 살아돌아왔더라도 어쩐지 납득이 들 것만 같은 느낌...=_=;; 주인공 라이언 스톤 역의 산드라 블록은 정말 열연이라는 말 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지상과 수백 km 떨어진 우주공간에 고립된 채 혼란과 두려움, 상실감을 느끼면서도 결국 삶에 대한 의지를 되찾고 지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캐릭터를 설득력있게 표현합니다. 수많은 과학적 오류가 있는 설정이고 이야기 진행도 상당히 작위적인 부분이 많지만, 경이적인 화면과 산드라 블록의 연기로 이 모든 단점들을 커버하죠. 그리고 더불어 우리나이로 50을 바라보는 분께서 저 군살없는 탄탄한 몸매라니...o_o;; 


영상을 살피면 우주공간을 담아낸 장면들 외에도 꽤 인상적인 시퀀스들이 있습니다. 우주정거장에 진입한 스톤이 우주복을 벗으며 자신의 몸을 끌어안는 연출은 의도적으로 자궁 속 태아의 형상을 연상케 하는 연출이고, 탈출선 안에서 관제소와 교신하기 위해 애쓰다가 엉뚱하게도 이누이트 '아니가크'의 무전과 연결된 스톤이 언어가 통하지 않음에도, 라디오 저편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울고 웃는 장면 역시 매우 인상적이죠. (한편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아들은 이 장면을 지상에 있는 아니가크의 시점에서 시점에서 그린 단편영화를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지상에 도착한 스톤이 호수 밖으로 헤엄쳐나와 두발로 대지에 서는 장면이 주는 감동도 상당합니다. 


영화는 결국 관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누구이든 어디에 살고 있든 우리는 모두 중력의 그늘 아래 연결된 존재들이죠. 미국에서 온 우주비행사와 북극지역에 살고 있는 이누이트... 아무 관련이 없어보이는 이들이 무전을 통해 연결될 줄 누가 알았게습니까? 작중 라이언 스톤은 딸을 잃은 뒤 세상과 인간관계로부터,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우주의 조용함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지만, 정말로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중력이 그녀를 놓아버리는 순간 거대한 공포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리고 무전을 통해 희미하게 들려오는 낯모를 이의 목소리에 울고 웃고, 한 때 그녀가 거부했던 중력에 의지해 어머니 대지의 품에 다시금 안기게 되죠. 때론 귀찮게도, 때론 힘겹게도 느껴지지만 아무 의지할 것이 없는 우주공간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는 중력이 그렇듯, 인간은 결국 관계 속에 속해있는 존재이고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살 순 없습니다. 기쁜 일이든 슬픈 일이든 나와 연결된 사람들과 함께 짊어지고 서로에게 의지하는 것... 이것이 인생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