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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아티스트 봉만대, 2013


봉만대는 여러모로 한국 영화계에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음지'로 천대받는 AV 영화로 출발해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을 통해 충무로에 진출하고, 또 TV 영화까지 옮겨다니며 20여 년 동안 오직 에로영화 외길을 걸어온(신데렐라만 예외?) 필모그래피는 정말 '한국의 잘만 킹'이라거나 자칭 '에로 거장'이란 호칭이 무색하지 않다. 그리고 이 봉만대의 드라마틱한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가 아닐까 싶다.


'남극일기', '헨젤과 그레텔'의 임필성 감독은 이파니, 성은, 곽현화, 여현수 등과 함께 발리에서 에로틱 스릴러 영화 '해변의 광기'를 촬영 중이지만 현장까지 쫓아와 흥행이 될만한 에로 분량이 적다며 불만을 제기하는 제작자와 충돌 끝에 촬영 포기를 선언해버린다. 제작자는 '떡씬'의 보강을 위해 에로영화 경험이 풍부한 봉만대를 새 감독으로 섭외하고 일이 없어 놀고 있던 봉만대는 기쁜 마음으로 발리에 도착하지만, 아직 떠나지 않은 임감독과의 불편한 동거, 임감독이 하차하자 떠나버린 촬영팀, 봉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뒤 노골적인 에로영화로 전락하는 게 아닐까 불안에 떠는 여배우들, 체제비 충당을 위해 영화 촬영과 여배우들 섹시 화보 촬영을 병행하며 봉감독에게 전후맥락 생략한 채 오직 자극적인 '떡씬'만 찍어줄 것을 요구하는 제작자까지 상황은 카오스... '아티스트 봉만대'는 이런 상황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영화를 완성해보려는 봉만대 감독의 고군분투를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다. 


영화는 에로 영화이자(사실 에로 영화라기엔 야한 장면이 많진 않다. 분명 뒷모습 전라노출 등 수위가 센 노출 씬도 있고 적나라한 장면들도 있지만, 분위기 자체가 야한 쪽이 아닌지라) 에로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배우들에 대한 영화이자 감독 본인에 대한 영화이다. 또한 이 영화는 서글픈 블랙 코미디이기도 한데,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봉만대의 자조적 유머라든지 실명으로 출연한 등장인물들이 서로를 디스하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쓰다. 


이 영화의 최대 장점 중 하나는 디테일이다. 나야 뭐 영화판에 있는 사람이 아니니 얼마나 사실을 담고 있는지야 사실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영화판의 모습은 꽤나 그럴듯 하다. 흥행을 위해 노골적인 노출을 요구하는 제작자와 노출이 아닌 연기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여배우들 사이에 낀 채 어떻게든 여배우들을 어르고 달래며 '좋은' 장면을 만들어내려는 봉 감독의 고뇌, 얼음물 하나 가져오는 것 때문에 폭발하는 연출부와 제작부의 갈등, 제작부와 연출부의 교통정리도 명확하지 않고 워킹 비자가 아닌 관광 비자로 들어와 영화 촬영과 화보 촬영을 병행하는 소규모 영화의 열악함, 그 험난한 좌충우돌 속에 영화를 완성했지만 결국 배급사의 결정에 봉감독의 촬영분이 엎어지는 모습 등은 정말 AV 영화부터 충무로 영화까지 두루 거치며 오랫동안 영화계에 몸담았던 봉만대기에 보여줄 수 있는 디테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장점은 단연 진솔함이다. 시종일관 '정통파' 감독의 권위를 내세우며 찌질하게 굴다가 결국 모두에게 빅엿을 먹이고 퇴장하는 임필성 감독이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4차원 세계와 전라노출을 보여주고 사라진 김나미(그녀는 유일하게 배역명이 실명이 아니다)는 블랙코미디에 걸맞는 영화적 캐릭터들이지만, 나머지 인물들은 정말로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할 수 없을만큼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 곽현화와 여현수가 서로 "네가 그렇게 벗고 다니니까 여자가 아니라 창녀 소릴 듣는 거야", "번지 점프를 하다? x발 10년 전 거 아직도 우려먹냐?"라며 서로의 아픈 곳을 후벼파는 모습도 인상적이고, 작품 후반 곽현화의 갑작스런 이탈로 인해 곽현화의 노출 분량까지 대신 찍게 된 성은이 "10년 전 노출 이미지를 벗어나려 발라드도 불러보고 정극 연기도 해봤지만 모두 망했다. 그 사람들은 발라드를 부르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극장에 걸리는 영화에 출연해 부모님 모시고 부끄럽지 않은 딸의 모습 보여드리고 싶었는데..."라며 울먹이는 모습은 아마도 연기가 아닌 그녀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가장 명장면은 제작자와의 갈등으로 폭발한 봉만대가 이대표에게 불꽃 싸다구를 날리고 "그래, 막 벗겨먹으니까 좋지? x발놈들... 그러니까 한국 영화가 x같아 지는거야. 에로영화의 족보도 모르는 새끼들이 벗겨대기만 하니까 다 싸구려 컨텐츠만 만들어내는 거라고, 이 x발놈들아. 니들이 에로를 알아?"라고 일갈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이른바 '정통파' 출신들에게 싸구려감독으로 무시당하고 제작자에게조차 그저 노골적인 '떡씬'이나 찍어줄 것을 강요받는 처지에서도 최소한의 자존심, 자신만의 에로영화 철학을 지켜나가고 싶은 봉만대의 진솔한 바람이 드러나는 장면인 동시에, 현실에서는 결코 대놓고 하지 못할 말을(싼 값에 '떡씬'이나 찍으려 데려온 감독이 제작자에게 손찌검하고 당당하게 일갈이라니...) 자신의 영화를 통해서나마 쏟아내려는 정신승리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에로틱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배우들을 조율하고, 여배우를 어르고 달래어 설득해야 하는 감독의 고뇌와 영화 촬영현장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디테일하게 그려낸다는 점에서는 카트린느 브레야 감독의 '섹스 이즈 코미디'를 닮았고, 메이저 영화판에서 무시당하는 B급 감독이 속물적인 제작자와 감독을 따르지 않는 배우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하며 어떻게든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보려 고군분투하는 모습에서는 팀 버튼 감독의 '에드 우드'가 오버랩되기도 한다. 세 영화 모두 감독의 자전적인 성향이 강한 영화들이지만, 제3의 인물을 통해 감독의 모습을 투영한 두 영화와 달리 감독 본인이 주연까지 맡고 출연 배우들과 실명으로 출연해 자신의 과거를 스스럼없이 까발리는 '아티스트 봉만대'가 가장 솔직하게 다가온다.


'아티스트 봉만대'... 꽤나 자신감 넘치는 제목이자 처연한 제목이다. 과연 그의 바람대로 봉만대는 '에로 감독'이 아닌 '아티스트'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분명한 것 하나는 여기에 남들이 인정해주든 말든, 예술적 거장이라 생각하든 3류 에로감독으로 생각하든 괘념치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정을 다하며 돈키호테처럼 돌진한 한 사내가 있었다는 것이고, 앞만 보고 달려가는 그 모습은 결과에 상관없이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게 바로 예술가 아니겠나?


p.s. 이 영화는 한국 영화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한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임에도 AV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무시받았던 봉만대의 속 시원한 일갈과, 역시 오랜 시간 동안 AV 배우라는 꼬리표와 편견으로 고통받아왔던 성은이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모습만으로도 꽤나 가치있다. 


p.s. 2. 영화에서 옥에 티 아닌 티라면 이파니인데, 그냥 발리에 화보 찍으러 왔다가 옆에서 술친구 봉만대가 영화 찍고 있다길래 우정출연해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비중이 없다;; 봉만대 감독이 처음 도착했을 때 그저 여배우 벗겨먹는 에로 장르로 탈바꿈하는게 아닐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봉감독과 얼굴도 안 마주치려 하던 다른 여배우들과 달리, 봉감독과 짓궂은 농담따먹기도 하고 자신의 플레이보이 모델 시절을 언급하며 한국 영화촬영장의 열악함을 툴툴대는 등 노출연기에 별 거부감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데 실제로는 출연 여배우 중 가장 노출이 적다. 아니, 노출이 문제가 아니라 '해변의 광기' 촬영 씬조차 한번도 나오지 않고 그냥 봉감독 & 다른 배우들과 수다떠는 모습만 나오니 나중에는 이파니는 '해변의 광기' 출연배우가 아니라 그냥 촬영장에 놀러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