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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세상의 끝(The World's End, 2013)


2000년대 가장 독창적이며 포복절도할 좀비 영화였던 '새벽의 황당한 저주'(Shaun of Dead, 2003)에 이어 에드가 라이트 감독, 사이먼 페그 & 닉 프로스트 콤비가 함께 한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새벽의 황당한 저주나 스캇 필그림 vs 더 월드 등 에드가 라이트 감독과 취향이 잘 맞는 편이라 이름값만으로도 기대되었던 영화...+_+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던 10대 시절 고등학교를 막 마친 5명의 패거리 - 게리 킹, 올리버 체임벌린, 피터 페이지, 스티븐 프린스, 앤디 나이틀리는 '골든 마일 정복'이라는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무모하며 한낱 쓰잘데기 없고 바보 같지만 또한 지극히 영웅적인 도전에 나섭니다. 바로 그들의 고향 뉴튼 헤이븐에서 골든 마일 도로를 따라 늘어선 12개의 펍들 - 1호 우체통, 오래된 친숙함, 잘난 수탉, 수교, 좋은 동반자, 충실한 종, 두 머리 개, 인어, 벌집, 왕의 머리, 벽의 구멍 그리고 마지막으로 세상의 끝(World's End) - 를 하룻밤 동안 정복하는 거죠. 끊임없이 이어진 맥주와 자지러지는 웃음으로 출발했던 이 여정은 독주와 짜릿한 즐거움, 화끈한 패싸움과 마약을 거쳐 결국 숙취와 피에 물든 주먹, 맥주에 젖은 옷과 토사물 범벅이 된 부츠를 남긴 채 9번째 술집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고 결국 실패합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패거리들은 고향을 떠나 서로에게 멀어진 채 각자 자동차 판매원, 부동산 중개인, 건설사 현장소장, 작은 기업의 사장으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단 한 명, 두문불출인 무리의 우두머리였던 게리 킹만 빼고 말이죠. 어느날 그들 앞에 불현듯 게리 킹이-늙어버린 얼굴만 빼면 10대시절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여전히 커다란 코트와 부츠, 선글라스를 걸친 채- 나타나 20여년 전 끝내지 못했던 골든 마일 정복에 재도전하자고 제안합니다. 20여 년만에 뜬금없이 나타난 게리의 어처구니없는 제안에 나머지 패거리 멤버들은 황당해 하지만, 결국 뭐에 끌린 듯 20여 년전처럼 다시금 그에게 휘둘려 모이게 됩니다. 그리고 20여 년만에 다시 모인 다섯 명의 패거리는 골든 마일 정복에 재도전하기 위해 고향마을 뉴튼 헤이븐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만 봤을 땐 팀 앨런, 존 트라볼타 주연의 '거친 녀석들'이 그랬듯 일상에 찌들어 꿈과 서로로부터 멀어졌던 중년 아저씨들이 좌충우돌 일탈을 거치며 서로에 대한 우정을 회복하고, 고향마을에서 철없지만 꿈이 넘쳤던 과거를 추억하며 희망과 자신감을 되찾는다는 내용의 전형적인 로드 트립 무비가 될 것 같습니다만... 정말로 그런다면 에드가 라이트 감독이 아니죠. 이들이 고향 마을에 도착한 이후 영화의 장르는 갑자기 '바디 스내쳐' 류의 호러 SF와 믹스되며, 나중에는 아포칼립스물로 발전합니다;; 어찌 보면 배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황당한 전개지만 이거야말로 에드가 라이트 감독의 주특기 아니겠습니까? '황당한 새벽의 저주'가 그랬든 이 영화에는 영국적인 유머가 가득합니다. 즉각적인 포복절도라기보다는 반박자 지난 뒤 킬킬대도록 만드는 유머죠. 중의적 표현을 이용한 말장난 개그도 심심찮게 등장하고요.(하긴 제목부터 중의적 표현이죠.) 그리고 무려 12개의 펍을 하룻밤 동안 순례한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재의 영화답게 맥주와 영국 특유의 펍 문화에 대한 애정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정말로 시원한 맥주가 마시고 싶어 침이 꼴깍 넘어가요...+_+ 


재미있는 영화입니다. 아마도 취향에 따라 꽤나 갈리겠지만, 에드가 라이트의 전작들과 다소 썰렁한 영국식 유머, 그리고 사이먼 페그 & 닉 프로스트 콤비의 루저 개그를 좋아한다면 이 영화 역시 유쾌하게 보고, 게리 킹을 향해 외칠 수 있을 겁니다. "병신 같지만 멋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