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상상 속의 넌 폐허가 된 록펠러 센터에서 사슴을뒤쫒고 있어. 너는 영원토록 닳지 않는 가죽 옷을 입고 시어스 타워를 휘감은 넝쿨을 타지. 밑에서는 사람들이 옥수수를 빻고 빈 도로 위엔 사슴들이 뛰어다녀."
우리는 풍요롭다.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가 겪었던 전쟁이나 가난을 겪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까지 이 땅 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세대보다도 풍족하고 많은 것을 배웠고 자유로운 문명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전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자살률이 높다. 이전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많은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우리는 이전의 모든 세대가 부러워할만한 풍요를 누리지만 행복하지 않다.
우리는 이성적이다. 우리는 언제나 첨단과학을 추구하고 문명의 이기 속에 살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비현실을 동경한다. 판타지 붐이 일고 신화에 탐닉하고 사극에 빠져든다. 우리는 이전의 그 어떤 세대보다도 이성적이고 과학적이고 현실적이지만 마음속 한 켠에선 끊임없이 신화와 야만의 시대를 갈구한다.
왜 우리는 만족하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풍요 속의 빈곤을 겪는가?
주인공은 유명 자동차회사의 보험 조사원이다. 전국에서 일어난, 자동차 결함에 의한 수많은 사고를 조사하고 사고로 인한 브랜드 이미지의 실추 정도를 따져 단순 피해자 배상으로 끝낼 것인지 리콜을 단행해야 할 것인지 판단해 보고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희생자의 비극 따위엔 관심 없다. 사람의 목숨이란 배상이냐 리콜이냐를 결정하는 하나의 변수일 뿐이다.
끊임없는 항공출장으로 인해 만성피로와 불면증에 시달리던 주인공은 병원이나 정신과를 찾지만 효과가 없다. 그러나 우연히 접하게 된 치료모임에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경험담을 듣고, 그들의 품에 안겨 울며 주인공은 오랜만의 편안함 - 희망을 버렸을 때 찾아오는 편안함 - 을 느낀고 잠을 잘 자게 된다. 그 후 그는 고환암, 알콜 중독자, 대장암, 뇌종양 등 각종 난치/불치병 모임에 환자를 위장해 찾아가는 모임 중독자가 되고 한 동안 잠을 잘 자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짧은 평화는 말라에 의해 끝난다. 말라 역시 자신을 위장한 모임 중독자고 주인공은 "난 네가 가짜란 걸 알고 있어"라고 말하는 듯한 말라의 냉소적인 태도에 이전 같은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급기야 그는 말라에게 어 이상 모임에 나오지 말아줄 것을 요구하고, 거부하는 그녀와 협상해 서로 같은 모임에서 만나지 않도록 스케줄을 조정해 연락처까지 주고 받는 기묘한 관계를 맺고 헤어진다.
더 이상 말라와 마주치지 않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주인공은 출장 비행기 옆자리에서 반항적인 태도의 타일러 더든과 만나 대화를 나눈다. 더든에게 명함을 받고 헤어진 주인공은 자신의 아파트 - 취미로 사들인 수많은 가구들이 있던 완벽한 - 가 화재로 인해 날아갔음을 알게 된다. 묵을 곳을 찾지 못하던 주인공은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타일러 더든에게 전화를 걸고 그와 함께 술을 마시며 차츰 그의 도발적인 언행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급기야 그의 집에서 동거까지 제안한 주인공이 술집을 나서는 순간, 더든으로부터 매우 뜻밖의 요구를 받는다. 자신을 때려 달라고...
머뭇거리면서도 주인공은 결국 더든에게 주먹을 날리고 서로 치고 받으며 싸우게 된다. 그리고 이 순간 주인공과 더든 모두 자신이 살아있다는 원초적인 에너지와 쾌감을 느낀다. 이후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싸울 것을 약속하고, 두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며 흥미를 느끼던 다른 사람들도 점차 가세하며 이들의 모임은 클럽 지하에서 정기적으로 1:1 싸움을 벌이는 파이트 클럽으로 발전한다.
현대사회를 바라보는 원작자 척 팔라니욱의 시선은 지극히 냉소적이지만 동시에 날카롭다. 초반부에 설명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피로에 찌들고 의욕을 상실한 채 톱니바퀴마냥 기계적 일상을 살아가는 한심한 현대인의 전형이다. 언뜻 보기에 주인공은 명석하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성공적 직장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감정이 없다. 사람의 목숨을 단지 변수로 취급한다. 끊임없는 출장에 치여 잠들지도 깨어있지도 못한 흐리멍텅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고 포르노 테이프 대신 가구 카탈로그를 낀 채 끝없는 소비를 통해 억눌린 욕망을 해소한다. 쉴 곳을 찾지 못하던 주인공은 희망을 포기한 패배자들이 모여 자기 연민이나 늘어놓는 수많은 환자 모임에 끼어들고서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고, 환자도 아니면서 가짜 이름으로 자신을 위장한 채 각종 모임에 탐닉한다. 그는 독립된 개체가 아닌 집단의 일부다. 주체가 아닌 객체다. 필요도 없는 곳에 돈 쓸줄 밖에 모르는 소비문화의 부산물이다. TV의 노예다. 거세된 채 태어난 아비 없는 자식이다.
그러나 타일러 더든과의 만남, 그리고 파이트 클럽은 그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는다. 파이트 클럽에서 그는 더 이상 현대사회의 나약한 부속품이 아니다. 파이트 클럽에서, 어떤 가식이나 위선도 없이 오직 남자 대 남자로서의 싸움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욕망은 더 이상 억누를 필요가 없다. 소리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고 땀에 젖고 피 흘리며 문명사회에서 꽁꽁 숨길 수 밖에 없었던 원초적인 야만과 폭력이 눈을 뜬다. 뜨거운 열기와 아드레날린의 분출 속에서 그는 노예가 아닌 주체다. 집단을 거부한 개체다. 살아 숨쉬는 한 명의 인간이며,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되찾은 신화 시대의 전사다.
파이트 클럽의 소재는 매우 도발적이다. 팔라니욱은 남자는 케빈 클라인의 노예가 되고 여자는 자신이 뺀 지방을 다시 사들이는, 그 어느 세대보다도 풍요롭지만 정신적 공황으로 고통받는 현대인을 날카로운 눈으로 진단하지만 인간성 회복을 위한 대안으로 다름아닌 폭력을 제안한다. 등장인물들은 파이트 클럽을 통해, 원초적인 야만과 폭력의 분출을 통해 점차 강인해지고 자신감을 얻어간다. 글 첫 머리에 인용한 타일러 더든의 대사는 문명사회를 거부한 과거 신화시대로의 노골적인 동경을 담고 있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 우리가 이제껏 발전시켜온 모든 문명을 거부하고 순수한 폭력과 야만의 신화시대로 회귀해야 한다는 이 대담하고도 매우 위험한 주장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의 후반부에서 파이트 클럽이 갖는 모순과 위험성은 드러난다. 초기의 파이트 클럽은 순수한 폭력만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곳엔 미움이 없다. 그들이 싸우닌 이유는 상대방을 증오해서나 때려눕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직 살과 살이 맞부딪치고 피와 땀이 흐르는 생생한 열기 속에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의 몸을 느끼기 위한 매우 순수한 욕망을 위해서다. 그곳엔 승자와 패자도 없다.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싸우고 이겼든 졌든 상대와 포옹을 나누며 되찾은 자아에 만족하던 수컷들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수록 파이트 클럽은 점차 변질되어간다. 그들은 점차 되찾은 자아에 만족하지 않고 그동안 자신의 자아를 억눌러온 사회에 분노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파이트 클럽의 리더인 타일러 더든은 그들을 말리긴커녕 오히려 선동하여 사회에 대한 테러를 명한다. 처음에는 스프에 침뱉기, 모르는 사람에게 시비 걸기 등 장난처럼 시작되었던 그들의 움직임은 점자 군대처럼 조직화되고 방화와 폭파로 발전하고 마침내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친위대를 연상시키는 블랙 스판 차림의 초토화 대원들이 현대 신용사회의 상징이자 소비문화의 첨병인 신용카드 회사들을 날려버림으로써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마비시키고 현대문명을 붕괴시키려는 시도에 이른다. 현대사회의 부속품이길 거부하고 자아와 자유를 되찾으려던 자들이 강력하게 통제되는 권위적 집단의 부속품이 되어 소속감을 느낀다. 초토화 대원에겐 이름조차 없다. 질식된 현대문명에서 벗어나 인간으로서 살아있는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파이트 클럽이 이제껏 존재했던 그 어떤 조직보다도 비인간적이고 강압적인 조직으로 바뀌어가는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타일러 더든은 순수했던 야만의 시대 한없이 자유로운 개인을 꿈꾸지만 그 방법으론 지극히 강압적인 조직을 택하는 모순을 저지른다. 점차 더든을 숭배하는 광신교적 조직으로 변질되어가는 파이트 클럽은 결코 순수한 야만인으로 돌아갈 수 없다. 더든에 의한 새로운 강압적 사회를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사실 때문에 주인공은 내적 고뇌를 겪으며 타일러 드든을 막아보려 하지만, 마지막 장면은 신용카드 회사들이 무너져내리고 더든의 계획이 성공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파이트 클럽의 순수성을 회복하려던 주인공이 살아남으며 변화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희망은 마지막에 흐르는 Pixies의 'Where is my mind?'의 몽환적인 멜로디만큼이나 불명확하다.
소재와 주제 면에서 꽤나 도발적이고 위험한 영화다. 도발적인 원작에 스타일리시트 데이빗 핀처가 감각적인 영상을 더한 영화는 개봉 당시부터 야만과 폭력을 찬양하는 거냐는 거센 비난과 논란을 낳았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논란과는 관계없이 시종일관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고 수컷들의 본능을 일깨운다는 것이다. 원초적인 폭력의 욕구를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고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픈 과시욕, 기존의 모든 것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고픈 정복욕, 절대적 강자에 대한 동경 등 수컷 특유의 성향이 파이트 클럽에는 고스란히 담겨있다. 파이트 클럽에 여자는 없다. 노인이나 어린아이도 없다. 문명이라는 좁은 우리에 갇혀 조금씩 야성을 잃어가며 불안해하는 수컷만이 존재하며 영화는철저하게 그들의 시선을 따른다. 머릿속에선 치기 어린 위험한 방법론이라 비난하면서도 가슴 속에선 피가 끓어오른다. 더든의 일탈을 통해 내 안의 잠자던 맹수가 깨어나 문명이니 예절이니 경졔니 하는 모든 가식과 구속들을 부숴버리고 광야를 달리며 오직 내 힘으로 사냥한 사슴 한 마리로 배를 채우던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자고 포효한다. 억눌린 수컷들의 유치한 자위라 비난해도 좋다. 영화가 흐르는 이 순간 만큼은 나 역시 영원토록 닳지 않는 가죽옷 하나 만을 걸친 채 빈 도로 위의 사슴을 뒤쫓는 한 마리 사나운 수컷이니까.
'영화, 애니메이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2012) (0) | 2012.06.17 |
---|---|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2010 (0) | 2012.01.26 |
씬 시티(Sin City, 2005) (0) | 2012.01.26 |
다이하드 4.0(Live Free or Die Hard, 2007) (0) | 2012.01.26 |
엑스칼리버(Excalibur, 1981) (0) | 2012.01.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