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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씬 시티(Sin City, 2005)

 

 

씬 시티(Sin City)는 미국 코믹스 계의 전설적인 거장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다. 프랭크 밀러는 씬 시티 외에도 최근 영화화된 「300」, 마블 코믹스의 「데어데블」과 「일렉트라」, DC 코믹스의 배트맨을 소재로 한 「흑기사, 돌아오다」 등의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특히 「흑기사, 돌아오다」는 삐딱하게 보면 자칫 "부잣집 도련님의 취미생활 영웅놀이"로 비치기 딱 좋은 배트맨의 캐릭터에 강력하고 어두운 카리스마를 부여하여 "시민들로부터 배척받는 정신분열 직전의 음울한 안티 히어로"라는, 단순열혈 성향의 여타 DC 코믹스 캐릭터(성격만 놓고 보면 배트맨은 마블, 판타스틱4는 DC가 더 어울린다;;)와 차별화된 복합적인 배트맨의 이미지를 있게 한 걸작이다.(팀 버튼 감독, 마이클 키튼 주연의 영화 배트맨 1,2는 볼거리만 화려한 블록버스터였던 후속작들과 격을 달리 하는 음울함이 짙게 배어있으며, 이것은 분명 프랭크 밀러의 영향이다.)

 

씬 시티가 프랭크 밀러의 화려한 필모그래피 가운데서도 주목받는 점은 극단적으로 폭력적이고 만화적이지만, 한꺼풀 벗겨보면 더없이 현실적이고 매혹적인 세계관(지극히 만화적인 슈퍼히어로물에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를 담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표현력은 프랭크 밀러의 특기다.)도 한 몫 하지만, 만화는 선과 형과 색으로 이루어진다는 구성요소의 상식마저 뒤흔드는 대담한 표현력이 좀 더 큰 비중을 차지할 것이다. 씬 시티에 얇은 선이나 화려한 컬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7권 제외. 7권은 신 시티에서 매우 모호한 작품이다.) 대신 무거운 느낌의 흑백 화면 속에 극단적인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명암이 선을 대체하고, 가끔 식 등장하는 색채는 단순한 색 이상의 의미를 전달한다. 씬 시티의 화풍은 결코 현실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오직 명암으로 이루어진, 언제나 일부는 빛에 노출되어있지만 다른 부분은 그림자 속에 녹아드는 화풍은 매우 독특하고도 매혹적이다.

 

그러나 이 씬 시티의 대담한 화풍은 영화화의 큰 걸림돌이기도 했다. 휘황한 광원효과와 색채에 익숙한 현대영화의 화법으로 씬 시티의 분위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출간 이후 15년이 다 되가는 시점에서 드디어 씬 시티의 영화화를 시도한(정확히는 영화화를 시도하여 프랭크 밀러의 허락을 받은) 감독이 등장했다. 바로 헐리우드의 악동 로버트 로드리게즈. 그를 스타로 만든 황혼에서 새벽까지 시리즈에서 거침없는 폭력성과 선정성, 잡탕성향을 자랑했던 그는 한 동안 가족영화인 스파이키드 시리즈와 실망스러웠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멕시코를 찍으며 재기가 바랜 거 아니냐는 우려를 사기도 했지만, 그는 씬시티에서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로드리게즈는 씬시티에 현대영화의 화법으로 접근하는 대신 오직 로드리게즈만이 시도했을법한 정공법을 택한다. 바로 원작의 느낌 그대로 흑백촬영을 시도한 것이다. 과장된 조명으로 인한 강한 명암과 끊임없이 이어지는 독백... 씬 시티는 21세기 영화임에도 오히려 화법에선 과거의 무성 흑백영화를 닮은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장면은 디지털로 촬영되어 보정된 것이며, 거의 모든 배경은 블루스크린 위에 CG로 작업된 것이다. 한 영화의 비주얼 속에 고전적인 느낌과 현대적인 감각이 절묘하게 공존한다는 점, 그래픽 노블과 영화라는 장르의 차이를 뛰어넘어 원작의 각 장면장면을 영화 속에 거의 완벽하게 재현했다는 점에서 씬 시티의 비주얼은 비주얼혁명이라 칭할 만 하다.

 

천재 감독 로드리게즈가 원작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존경을 드러내며 장르의 벽을 깨고 이 육중한 폭력의 도시를 스크린에 재현했다면, 배우들의 호연은 씬 시티의 다양한 캐릭터들을 책장 밖으로 일깨운다. 특히 마브 역의 미키 루크는 특수분장에 힘입어 도저히 이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은 마브의 터프한 모습을 살아 숨쉬게 만들고, 잭 레퍼티 역의 베네치오 델 토로는 외모에서 행동 하나하나까지 정말 그래픽 노블 속에서 튀어나온 듯 하다. 존 하티건 역의 브루스 윌리스나 드와이트 매카시 역의 클레이브 오웬은 몇몇 특징적인 모습을 제외하면 원작의 인물과 외모 면에선 같지 않지만, 원작의 캐릭터들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목소리와 액션, 분위기를 보여주며, 케빈 역의 엘리야 우드, 낸시 칼라한 역의 제시카 알바는 오히려 원작의 다소 밋밋했던 캐릭터를 뛰어넘는 매력을 뿜어낸다. 옥의 티라면 샐리 역의 브리트니 머피 정도... 커다란 눈이나 새된 목소리가 원작의 캐릭터와 나무랄 데 없이 닮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미스 캐스팅이란 느낌이 든다.

 

누군가가 말했다. "씬 시티의 여자는 세 부류다. 창녀거나 악녀거나 둘 다거나." 맞는 말이다. 씬 시티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매혹적이며 돈이나 다른 목적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이용한다.(유일한 예외라면 루실 정도일까?) 그와 대조적으로 남자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자존심 강하고 거칠지만 순수하며, 여자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진다. 눈요기나 구출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여성과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기사라는 이런 시대착오적이기까지 한 극단적 캐릭터는 골수 페미니스트의 눈에는 매우 거슬리겠지만, 나는 그 쪽이 아니라 재밌게 봤다;; 여성분들도 그냥 이건 영화니까 하는 마음으로 봐주길 바란다;; 어쨋든 씬 시티의 주인공 마브, 드와이트, 하티건 모두 여자를 위해 목숨 거는 순정파 터프가이라는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각기 개성있는 캐릭터를 뿜어낸다.

 

"하드 굿바이"의 마브는 문자 그대로의 터프 가이다. 믿을 수 없는 힘과 험상궂은 외모의 마브는 원작의 표현대로라면 "근육으로 이루어진 2m 짜리 폭력의 화신"이며, 드와이트의 말을 빌리자면 "고대에 태어나 적의 얼굴에 도끼를 날리거나 상대 검투사의 몸에 검을 꽂아야 제격인" 캐릭터다. 영웅적인 전사가 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시대를 잘못 타고난 이 불운아는 악의는 없지만 항상 사건을 일으키며, 당면한 문제를 언제나 폭력으로 해결한다. 험상궂은 외모 때문에 어떤 여자도 그와 자려고 하지 않았지만 어느날 찾아온 골디가 그에게 꿈같은 하룻밤을 선물하고, 마브는 죽은 골디의 복수를 위해 씬 시티 거대권력의 정점 로크 추기경에게 자신의 방식, 매우 시끄럽고 고약한 방식으로 도전한다. 마브의 적은 죽을 때 지옥이 천국처럼 보였을 것이다. 죽기 전에 마브가 그에게 한 짓은 지옥보다도 훨씬 잔인했을 테니까.

 

"성대한 도살의 축제"의 드와이트는 씬 시티에서 다소 특이한 캐릭터다. 마브가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돈키호테 캐릭터의 전형이라면(다만 풍차에 달려들다 우스운 꼴을 당한 돈키호테와 달리 마브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그 어떤 것도 박살낼 준비가 되어있다) 드와이트는 씬 시티네 매우 드문 햄릿 캐릭터다. 죽은 시체와 상상 속의 대화를 하고, 다가오는 경찰에게 뇌물을 줘야 할지 죽여야 할지 고민하며 죽여야 할지도 모를 경관도 평범한 집과 가족, 아직 갚지 못한 주택융자금이 있을 거라 걱정하는 그의 모습은 매우 낯설지만 매우 인간적이다. 그러나 그 역시 가슴 속엔 자기자신마저 태워버릴, 세상에 허락되지 않은 뜨거운 불꽃이 있고 신중하게 고민을 거듭하다가도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수많은 적들을 죽이고 자기자신마저 죽일지 모르는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데 주저함이 없다. 마브 같은 엄청난 힘은 없지만 불굴의 의지로 반드시 방법을 찾아내는, 불같은 열정과 차가운 이성을 모두 갖춘 캐릭터. 다만 여자 보는 눈이 없다;;

 

"노란 녀석"의 하티건은 터프 가이들이 넘쳐나는 씬 시티에서도 단연 가장 뜨거운 가슴을 가진 남자다. 그는 30년 동안 시민을 섬기고 범죄자들에 맞선, 씬 시티에선 멸종된 것으로 여겨진 진짜 경찰이며, 심장병으로 은퇴를 앞두고도 모든 안위를 뒤로 한 채 아동 성도착자인 로크 주니어(로크 추기경의 조카이자 로크 상원의원의 아들. 씬 시티는 로크 집안 파멸기란 얘기도 있다;;)의 무기를 날려버린다. 손에 쥔 무기와 다리 사이의 무기 둘 다. 자신이 날려버린 범죄자의 죄목까지 뒤집어쓰고 8년 동안 억울한 독방살이를 하면서도 결코 자존심을 꺾지 않았지만, 8년 전 로크 주니어의 손에서 구했던 낸시 칼라한이 또 한번 위험에 처하자 자존심과 명예, 심지어 목숨까지 모든 것을 내던지고 다시 씬 시티의 뒷골목에 뛰어든다. 저울대의 반대편에 놓인 것이 자신의 목숨이란 것을 알면서도, 모든 것을 마치고 홀로 쓸쓸히 죽어가면서도 자신이 구한 소녀를 생각하며 "공평한 거래"라고 만족할 수 있는 사나이... 그가 바로 존 하티건이다.

 

씬 시티(Sin City)... 범죄의 도시... 단순히 제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두 마디의 단어만큼 이 도시를, 이 작품을 잘 표현한 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식 명칭은 베이신 시티(Basin City)지만 모두가 씬 시티라 부르는 이 도시는 한 때 골드러시로 호황을 누리다가 몰락한, 그리고 파멸 직전에 모든 돈을 끌어모아 프랑스의 최고급 창녀 수입이라는 극단적인 처방(이걸 계획한 것이 로크 추기경의 고조부.)을 통해 황금 대신 환락으로 다시 번성한 죄악의 도시... 부패한 추기경과 상원의원이 권력을 휘두르고, 무능한 경찰의 방치 속에 마피아와 갱과 창녀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눈 채 대립하며 두 블록마다 하나 씩 있는 술집이 밤이 되면 미어터지는 이 더럽고 위험하고 아찔한 지옥도에서 주인공들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다. 죽은 여자의 복수를 위해, 올드 시티의 친구들을 위해, 위험에 빠진 소녀를 다시 한번 구하기 위해 그들은 위험하고 폭력적인 극단의 길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진다. 그들은 진통제와 독한 데킬라 한 잔을 목 안에 털어넣고 사납게 포효하는 머슬카에 올라타 밤거리를 내달리며 그들의 총구는 적의 심장을 향해 거침없이 불을 뿜는다. 이 세상은 그들의 열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은 자신들마저 태워버릴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다. 떄론 그것이 죽음을 의미한다 해도, 때론 그것이 성대한 살육을 의미한다 해도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면,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멋지게 끝마칠 수 있다면 웃으며 죽을 수 있을 테니까. 늙은이의 목숨을 바쳐 소녀를 구할 수 있다면 공평한 거래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