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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다이하드 4.0(Live Free or Die Hard, 2007)

 

 

다이 하드... 시간적 간격은 띄엄띄엄하고 각편의 연관성은 별로 없지만 시리즈로 나오는(게다가 같은 배우가 주연을 맡는!!) 몇 안 돼는 액션 영화다. 폐쇄 공간에서의 긴장감을 강조하며 액션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던 1편, 공항을 무대로 화끈한 액션과 개그를 선보였던 2편, 사무엘 잭슨과 투톱으로 나서며 두뇌싸움적 요소가 강했던 3편까지 각 편의 성격은 상이하지만 그 중심에는 주인공 존 맥클레인이 있다. 언뜻 보면 아무 연관조차 없어보이는 영화들을 하나의 시리즈로 묶어주는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가 가지는 힘은 그 이름만으로도 이미 하나의 아이콘인 007에 뒤지지 않는다.

 

폐쇄된 초고층 빌딩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오직 혼자만의 힘으로 테러리스트에 맞서야 했던 다이하드 1의 맥클레인은 유능하고 고독한 영웅이었지만,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죽도록 힘든" 고생과 함께 내공이 쌓이며 삶에 찌들고 센스 만점의 농담과 투덜거림을 던지는 블루워커 영웅의 한 표상이 되었다.

 

맥클레인과 007... 앞서 맥클레인의 존재감은 007에 뒤지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 둘만큼이나 상이한 영웅이 또 있을까?

 

(최근엔 약간 인간적으로 변모했지만)오랜 세월 007은 첨단과 완벽함의 상징이었다. 영국 정보기관 MI6의 빵빵한 지원 속에 언제나 말쑥한 턱시도, 최고급 오메가 시계(가끔은 레이저도 내장된), 최고급 애스턴 마틴(미사일도 나간다), Q의 기상천외한 무기들로 무장한 007은 여유롭다. 그는 적과 대면하기 위해 항상 최고급 카지노, 요트, 호텔을 찾아디니고 이런 그의 모험엔 언제나 섹시한 외모의 미녀가 빠지지 않는다. 국가존망 더 크게는 세계존망의 위협 속에서도 언제나 여황폐하의 영광을 위해 싸우고 "섞지 않고 흔든" 드라이 마티니를 즐기고 일과 로맨스 모두를 놓치지 않는 제임스 본드는 남자들이 꿈꾸는 화이트 칼라의 완벽함 그 자체다.

 

그에 반해 맥클레인은 어떠한가? 지원? 맥클레인은 정보기관은 고사하고 자기가 일하는 경찰서의 지원조차 변변히 받아본 일이 없다. 그는 언제나 혼자다. 최고급 아르마니 턱시도? 다이 하드 시리즈의 전통은 "맥클레인은 영화 내내 단벌신사"라는 것이다...-_-;; 시간이 흐를수록 땀과 기름과 피에 찌들어 누더기가 되어가는 그의 싸구려 셔츠는 "죽을 고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자? 다이 하드 시리즈에 등장하는 악역이 아닌 여자는 맥클레인의 가족 정도다.(다이하드는 로맨스 요소가 완벽하게 거세되었다는 점에서도 참 특이한 영화다;;) 최고급 휴양지와 요트? 역대 다이하드 시리즈에서 맥클레인과 가장 친한 곳은 환풍구(;;) 혹은 터널(;;)이다. 본드가 눈부신 해변에서 유유히 선탠을 즐기는 그 시간 우리의 맥클레인은 항상 적에게 빼앗은 기관총 하나 둘러매고 어두운 환풍구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죽을 고생 해가면서 테러리스트와 싸워 이기고 나면? 본드는 항상 임무가 끝나고 본드걸을 얻었지만, 맥클레인이 죽을 고생 끝에 얻는 것은 항상 상처와 두통거리들이다. 시리즈를 거듭할수록 추레해지는 맥클레인의 일상(1편에선 꽤 유능하고 여자도 따르는 미남, 2편에선 사이가 좀 나빠졌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부인, 3편에선 가정소홀로 별거 및 이혼위기에 이어 4편에선 마침내 부인과 이혼하고 딸과도 사이가 안 좋다;;)은 다이하드 시리즈의 또다른 볼거리...(이런 페이스라면 5편에서 맥클레인의 가정사가 어떻게 될진 상상조차 두려워진다;;) 항상 재수 없게 사건에 휘말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혼자서 몸으로 부딛치며 정말 "죽도록 고생"해서 거대한 사건을 해결하지만 도무지 보상을 못 받는 불쌍한 맥클레인... 그는 진정한 블루워커 영웅이자 소시민의 표상이다.

 

서론이 길었다. 어쨋든 하고 싶었던 말은 헐리우드가 배출한 가장 투박하고 소시민적인 액션영웅 존 맥클레인이 12년만에 돌아왔다는 것이다.

 

무려 12년이다. 강산이 한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더욱이 세로운 세기가 열렸다. 더구나 새로운 밀레니엄이다. 그러나 맥클레인은 그대로다. 여전히 혼자고 여전히 단순 부대뽀고 여전히 터프하다. 90년대에조차 퇴물 또는 무조건 총부터 들이밀고 보는 야만인으로 여겨지던 맥클레인 형사가 21세기 첨단의 디지털 시대에 도무지 어울리기나 할까? 거의 시대착오적으로까지 여겨지는 맥클레인의 귀환이지만, 다이하드 4.0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컴퓨터 사용할 줄도 모르고 기계치인, 아직도 라디오로 유스와 쌍팔년도 락큰롤을 듣고 사건이 터지면 총부터 들이대는 이 "구식"의 맥클레인이 최첨단 디지털 테러에 맞서는 것, 바로 디지털 시대에 맞서는 아날로그 영웅의 귀환인 것이다.

 

다이 하드 4.0은 맥클레인의 캐릭터 뿐 아니라 액션에서도 "시대착오적"이다. 매트릭스의 네오가 보여주는 현란한 발차기나 슈퍼맨 액션은 없다. 트랜스포머 같은 변신 로봇도 없다. 해리 포터 같은 마법과 판타지도 없다. 액션이냐고 몸과 몸이 부딪치거나, 차로 들이박아버리는 아날로그 액션이 전부다. 그런데도 통쾌하다. 아니, 아예 눈을 뗄 수 없다. 언제나 경찰 보급용 권총 한 자루에 적의 무기 빼앗아쓰고 경찰차나 트럭을 몰고 다니는 맥클레인은 이번 편에서도 별볼일 없는 무기를 이용해 별볼일 있는 액션을 보여준다. 소화기로 중무장한 적을 날려버리고, 경찰차로 무장헬기를 폭파시키고, 트레일러로 최신예 F-35 JSF를 추락시키는 그의 액션은 CG빨이 아니라 정말 때리고 깨지는 느낌이 팍팍 전해지는 리얼액션이면서도 결코 상상하지 못했던 통쾌함을 선사한다.

 

다이하드 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맥클레인의 투덜거림은 여전하다. 개인적으로 다이하드 시리즈에서 가장 웃겼던 대사는 2편에서 맥클레인이 환풍구를 기어 침투하며 했던 말 "이런 맙소사, 또 테러범에 또 환풍구야."였다. 결코 좋아서 하는 게 아닌,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말려들어 싸우면서 두번 씩이나(이 때의 맥클레인은 자기가 두 번이나 더 엮이게 되리라는 걸 짐작이나 했을까?) 테러범에 엮여 죽을 고생하는 자기 자신을 자조하는 이 대사는 묘하게 처절하면서도 웃기다. 맥클레인은 4편에서도 여전히 퉁명스럽고 투덜대며, 이 투덜거림은 맥클레인의 불쌍할만큼 운수 사나운 일상을 여과없이 드러낸다는 점에서 매우 웃기다;; 물론 맥클레인도 이제 나이를 먹었고(그러나 원숙함이나 노쇠 따위는 아니다. 실제 나이로도 영화 상 나이로도 50은 훌쩍 넘겼을 그건만 단순함과 터프함은 한창 때 야생마 시절과 달라진 게 없다;;) 아들뻘 되는 철부지 해커 녀석을 챙겨야 하다보니 평소 그답지 않은 교훈적인 이야기나, 감상적인 이야기를 하긴 하지만 뭐 세월의 탓이라 이해해주자. "영웅은 무슨 얼어죽을, 얻은 건 두통 뿐이야." 같은 그의 대사에서 세월조차 막지 못한 그의 시니컬함을 느낄 수 있으니까.

 

다이하드 4.0은 영화 내내 눈을 떼기 힘들만큼 정말 박진감 있고 통쾌한 영화다. 초반 압도적으로 보이던 적이 용두사미로 너무 쉽게 무너지는 점은 좀 아쉽지만 그것조차 영화의 통쾌함을 빼앗진 못한다. 이것은 좀 맥클레인이라는 매우 시대착오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와 액션 자체의 힘이기도 하지만 영화 자체를 관통하는 반전의 힘이기도 하다. 이 반전이란 게 뒤통수 때리는 걸 말하는 건 아니다. 바로 자동차가 헬기를 때려잡는, 아날로그가 디지털을 때려잡는, 퇴물 소시민이 젊은 엘리트를 때려잡는 통쾌한 현실반전이다. 디지털 시대를 역행하는 아날로그의 반란, 도무지 영웅다운 구석을 찾아볼 수 없어 더욱 멋진 노병의 귀환... 맥클레인은 죽지 않았다. 이번에도 "죽도록 고생"은 했지만 콩글리쉬 해석 말따마나 "죽기 힘든" 영웅 아니겠는가...

 

p.s. 다이하드는 갈수록 배경이 넓어진다;; 1편은 폐쇄된 빌딩, 2편은 폐쇄된 공항, 3편이 뉴욕시 전역을 주무대로 한다면 4편은 미국 동부 전역이다. 5편이 나온다면 미국 전역이 되려나?;;

 

p.s. 2. 다이하드 4.0 내내 나오는 노키아 폰과 기어스 오브 워 게임... 미국에선 노키아와 엑박360이 대세인건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