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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엑스멘 : 최후의 전쟁(X-Men : The Last Stand, 2006)

 

 

개인적으로 코믹스 기반 영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다. 뭐 TV 시리즈를 섭렵했다거나 코믹스 원판을 구해 해석해가며 보는 매니아는 아니지만, 지극히 만화적인 능력을 갖춘 슈퍼히어로이면서도 또한 지극히 인간적인 고뇌에 괴로워하고, 선과 악의 구분조차 모호한 마블 코믹스 특유의 강력한 캐릭터성은 항상 날 매료시켰다.  그 중에서도 브라이언 싱어 감독의 엑스멘 시리즈는 원작 특유의 느낌을 살리면서도 과감한 재해석과 독특함이 묻어나 팀 버튼의 배트맨 1,2와 함꼐 가장 좋아하는 영화였다.

 

때문에 감독이 브렛 라트너로 바뀌었다는 불안한 소식에도 입대 후 첫 외박을 손꼽아 기다리며 기대에 가득차 본 영화가 바로 "엑스멘 : 최후의 전쟁"이었건만... 아무래도 기대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브라이언 싱어가 감독했던 엑스멘 1,2의 미덕은 이야기의 초점을 좁혔다는 것이다. 수십명의 개성 강한 캐릭터가 등장하고 각자의 에피소드를 가진 광대한 엑스멘의 세계를 단 2시간 분량의 영화에 담아야 했던 감독 입장에서 이것은 매우 당연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싱어 감독은 엑스멘의 수많은 캐릭터 중 울버린을 주인공으로 택했고, 1편과 2편에서 일관성 있게 베일에 쌓인 그의 과거를 캐냄으로서 몇 가지 의혹을 해소함과 동시에 더 많은 의혹을 증폭시켜왔다. 2편에 스트라이커 대령을 통해 울버린의 과거가 갖는 의혹을 상당부분 해소시키긴 했지만, 여전히 울버린의 많은 부분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비밀에 쌓여있었고 울버린은 자신의 정체성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나는 적어도 3편에서 이런 의혹들이 해소되리라 기대했다.(뭐 울버린의 과거는 사실 코믹스에서조차 베일에 쌓여있긴 하다. 그러나 영화에서 그의 정체성 문제만은 해결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편은 이런 기대를 철저히 배반한다. 영화는 진 피닉스의 부활, 돌연변이 능력을 영원히 제거하는 큐어의 등장, 큐어를 무기화하려는 정부측과 큐어를 파괴하려는 매그니토 세력의 거대한 전쟁 등 엑스맨 세계관을 뒤흔드는 거대한 스토리를 2시간 짜리 영화에 담으려는 우를 범했다. 이렇다보니 울버린의 과거와 정체성 따위의 개인적인 문제는 뒤로 밀려나버리고, 영화 내내 전쟁만이 되풀이될 뿐이다.

 

이는 1,2편에서 일관되게 이어지며 엑스멘 시리즈의 주제로 관통하던 울버린의 정체성을 단절시킴과 동시에 캐릭터 부재를 낳았다. 대표적인 캐릭터물인 엑스멘에 캐릭터 부재가 왠 말이냐고? 하지만 사실이다. 이 영화는 엑스멘임에도 영화 속엔 엑스멘이 없다.

 

물론 이 영화에 표면적으로 등장하는 엑스멘과 뮤턴트들의 수는 역대 최강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등장할 뿐 아무런 성격과 특징을 보여주지 못한다. 엑스멘의 리더임에도 영화 속에선 절망적인 비중을 보여주던 사이클롭스는 아예 등장 5분만에 퇴장해버리고, 2편의 주역 중 하나였던 나이트 크롤러는 아무런 설명조차 없이 출연하지 않으며,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뮤턴트 중 하나인 로그 역시 작품 내내 겉돈다. 매그니토 진영의 홍일점으로 치명적인 매력과 화려한 볼거리를 선사하던 미스틱 역시 너무나도 어이없게 초반 퇴장해버린다. 퇴장하는 엑스멘이 있으니 물론 새로 등장하는 엑스멘도 있다. 그러나 화려한 날개를 펼치며 멋지게 등장한 앤젤은 날개 말곤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하며, 돌연변이 성의 장관인 비스트 역시 울버린이 가세하기 훨씬 전부터 활약해왔던 올드 엑스멘임에도 아무런 설명조차 없다. 2편에 잠시 등장하며 3편 출연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했던 콜로서스와 키티는 나름대로 활약을 보여주지만 성격은 보여주지 못한다. 매그니토와 연합해 큐어를 없애려 전쟁을 벌이는 수많은 뮤턴트들은 이름과 능력조차 분명치 않다.(그들 중 대다수는 그냥 민간인 같다) 뭐 이들이야 조연이니 그렇다고 치자. 엑스멘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인물인 자비에 박사조차 1,2편에서 쌓일대로 쌓인 의문을 단 하나도 해소하지 못한 채 퇴장하며(2편에서 셀레브로에 접속해 텔레파시로 모든 인류를 죽일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을 가진 자비에는 왜 자신의 능력으로 뮤턴트나 인류의 정신을 설득해 평화를 이끌어내지 못할까?) , 중후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악역 매그니토 역시 여기에선 큐어를 없애기에 혈안이 된 성질 사나운 늙은이일 뿐이다. 스톰은 출연비중이 늘어 액션만 늘었을 뿐 냉철한 카리스마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가장 중요한 등장인물이라 할 진 피닉스 또한 전후반 한번의 폭주를 제외하면 도통 생각을 알 수 없다. 스캇과 자비에 교수를 조기퇴장시키고는 멍한 표정으로 매그니토 옆에 그저 장식품처럼 서있는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일까?

 

혹시 클램프의 만화 엑스를 애니메이션화한 극장판 엑스를 본 사람 있는지 모르겠다. 이 애니메이션 역시 만화의 다양한 캐릭터와 긴 호흡을 한정된 시간 내에 보여주려다보니 무슨 서커스마냥 캐릭터 등장하고, 자기가 가진 능력 한번 보여주고, 사망해서 퇴장하고 이런 구조가 되풀이되며 볼거리만 화려한 졸작이 되었다. 엑스맨 3편을 보는 내내 극장판 엑스가 강하게 오버랩되는 건 나만 받은 느낌인가?

 

뭐 거대한 이야기에 캐릭터가 함몰된 건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이야기는 잘 담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이것 역시 "아니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엑스멘 3를 보고 나왔을 때 머릿속에 남는 것은 오직 의문 뿐이다. 3편은 2편과 너무 단절된 나머지 2편에서 쌓였던 의문을 전혀 해소시켜주지 못함과 동시에, 3편 스스로의 의문도 해소하지 못하며 의문덩어리로 끝나고 만다. 울버린의 과거나 지나치게 능력 사용에 소극적인 자비에 교수, 나이트 크롤러의 행방 등도 묘연하기 그지없고, 3편의 결말은 더욱 의문 투성이다. 막판 아버지를 구출한 앤젤은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그는 새로운 엑스멘으로 합류할까?(사실 코믹스에서 앤젤은 울버린 합류 이전 비스트와 활동하던 엑스멘 1세대 중 하나다) 엑스멘은 다른 뮤턴트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찰리를 매그니토의 공격으로부터 구출했다. 그렇다면 큐어는 계속 제작되는걸까? 자비에와 스캇을 잃은 자비에 영재학교는 어떻게 되는 걸까? 큐어를 사용해 인간으로 돌아간 로그의 미래는? 매그니토는 정말로 능력을 잃은 것인가? 3편의 결말은 시리즈의 최종판임에도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암시도 주지 않는다.(매그니토는 혹시 모르겠군) 비스트가 다시 돌연변이성 장관에 취임하며 희망적인 미래를 암시하긴 하지만, 불확실한 변수가 너무나도 많다.

 

원작 코믹스의 스토리 구조에 빠삭하거나 2시간 동안 볼거리를 찾았다면 당신은 이 영화를 참 잘 고른 것이다. 그러나 코믹스와 구별되는, 영화로서의 엑스멘 시리즈가 갖는 매력을 보고 싶었다면, 이 영화는 대실망이다. 엑스멘 3는 엑스멘 1,2와 단절을 선언하고 코믹스로 돌아가려했지만, 엑스멘의 세계는 너무도 광대했다. 그 중 인물 하나나 에피소드 하나를 영화에 담을 순 있지만, 엑스멘의 거대한 스토리를 영화에 담으려 했을 때 어떠 결과가 나오는지 이 영화는 잘 보여준다.

 

p.s. 새로운 엑스멘 중 벽 통과능력자인 키티 그레이디(2편에서 학교습격 때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통과해 아래층으로 떨어지던 소녀를 기억하는가? 그녀가 바로 키티다)만큼은 나름대로의 개성과 능력을 보여주며 시리즈에 안착.(다음 편이 없다는 게 아쉽다;;) 그녀의 귀여움은 엑스멘 3의 또다른 볼거리~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