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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캣우먼(Catwoman, 2004)

헐리우드 역사상 유래없는 블록버스터 괴작으로 꼽히는 팀 버튼의 배트맨 2에는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유난히 많다. 소심함과 대담함, 화려한 외면 뒤에 감춰진 음울함을 동시에 갖춘 DC 코믹스의 개성만점 히어로(사실 성격 상 배트맨은 DC보다 마블이 잘 어울린다는 생각마저 든다) 배트맨의 매력은 여전하고 그로테스크한 외모의 악당임에도 마지막 장면에선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는 펭귄맨은 미워할 수 없는 악역이다. 하지만 비교적 짧은 출연비중에도 불구하고 이 모두를 뛰어넘는 치명적 매력을 발산한 캐릭터가 미셀 파이퍼가 분한 캣우먼. 필요에 따라 선역과 악역을 거침없이 오가지만 그 자유분방함 뒤엔 슬픔이 서려있는 이 캐릭터가 내뿜는 섹시함은 뇌쇄적이란 말이 뭔지를 제대로 보여준다.

 

어쨋든 배트맨의 조연캐릭터였던 캣 우먼이 배트맨 2에서의 폭발적인 지지에 힘입어 단독주연을 맡은 영화가 이 영화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망 그 자체. 졸작 중의 졸작이다.

 

이 영화는 일단 시작부터 캣우먼을 고담시 밖으로 끄집어내는 우를 범했다. 선악을 종잡을 수 없는 캣우먼의 치명적 매력은 정신분열증 직전의 거대한 박쥐인간이 하늘을 누비고 광대 복장의 갱들이 요란스러운 범죄파티를 벌이는 고담시의 기괴한 음울함 속에서 더욱 빛난다는 걸 모른 걸까? 배트맨과의 선긋기는 분명히 하더라도 고담시의 이미지만은 차용해와야 했다. 캣우먼에게 어울리는 배경은 밤이면 붉은 조명이 켜지고 폭력이 끓어넘치는 음험한 슬럼가지 밝게 빛나는 대도시에 눈비시게 하얀 화장품 회사가 아니다.

 

캐릭터에 대한 근본적인 몰이해도 보기 괴로운 수준이다. 여리고 약한 여자에서 그 누구도 정복할 수 없는 강한 자아를 가진 도발적인 캐릭터로 부활하는 것이 바로 캣우먼의 매력이다. 캣우먼은 (어느 정도 여성에 대한 무시와 비하의 의미를 담은)"Girl"이 아니다. 배트"맨", 슈퍼"맨" 등 히어로 캐릭터와 동등한 자아를 가진 "우먼"이다. 캣우먼이 된 뒤에도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이전의 모습을 버리지 못한 채 형사 앞에서 말도 버벅되고 눈물이나 짜내며 날 믿어달라고 애걸하는 모습은 캐릭터에 대한 모욕 수준이다.

 

뭐 이런 건 크게 상관없다. 코믹스의 히어로다운 강력하고 화끈한 액션만 보여준다면 이런 단점 충분히 눈감아줄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가장 실망스러운 점은 명색이 코믹스 히어로물이 액션조차 없다는 거다. 이 영화는 할 베리가 캣우먼으로 부활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한 나머지 캣우먼의 복장을 입고 첫번째 액션을 감행하는 것은 영화 시작 후 거의 1시간이 지나서라는 최악의 실수를 범했다. 그럼 그 초반 1시간을 잘 황용했느냐? 전혀. 초반 1시간만 보면 착하고 소심한데다 멍청하기까지 한, 백치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할 베리와 잘생긴 형사양반의 알콩달콩 로맨틱 코미디같다. 히어로물 주제에 액션에 투자한 시간보다 로맨스에 투자한 시간이 더 많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쫄딱 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그럼 남은 30분 동안 보여주는 액션이라도 화끈한가? 역시 전혀. 엉덩이를 요란스럽게 흔들어대며 몸매자랑하기 바쁜 할베리의 워킹은 잠깐이나마 눈요기가 되지만 이 영화의 액션 역시 역대 코믹스 기반 영화 중 가장 형편없는 수준이다.(똑같이 졸작이지만 차라리 엘렉트라가 훨씬 낫다.) 캣우먼이 작품 내내 쓰러뜨리는 적은 단 6명. 첫 출격 때 워밍업으로 간단히 제압한 강도 3명, 술집에서 채찍쇼하는 할베리 몸매 감상하느라 한눈 팔다 한방에 나가떨어진 경호원 한명, 언제나 샤론 스톤 곁을 그림자처럼 호위하며 만만찮은 포스를 보여주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주먹한방에 역시 나가떨어지는 경호원 한명, 그리고 샤론 스톤이 전부다.(워낙 없으니 요란스럽게 파티하다 할 베리에게 한방 맞은 놈까지 포함해줄까? 그럼 7명이군.) 그럼 악역을 맡은 샤론스톤은 좀 강력한 악당의 모습을 보여줄까? 그러기라도 했으면 오죽 좋아. 화장품의 부작용으로 피부가 대리석처럼 단단해지며 맷집 최강이 되긴 했지만 애초에 무술 따위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샤론 스톤이다. 캣우먼의 움직임을 따라가지도 못하며 샌드백마냥 일방적으로 두들겨맞다가 어쩌다 한번 기회잡고 반격 몇번 하는게 전부다. 반격하고는 바로 캣우먼에게 다시 정신없이 두들겨맞고 창밖으로 떨어져 R.I.P. 이처럼 허무하게 나가떨어지는 악역은 생전 처음 본다.

 

난 이 영화 감독의 두뇌구조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코믹스 히어로 물을 표방한 영화에서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캐릭터를 있는대로 망쳐놓고 동네 애들싸움보다 못한 10분짜리 액션에 되먹잖은 로맨틱코미디로 런닝타임 절반을 낭비할 수 있을까? 난 이 영화 감독 만나면 정말 때려주고 싶다. 이 놈은 영화 하나 잘못 찍은 게 아니다. 캣우먼 캐릭터를 모욕했을 뿐 아니라 형편없는 졸작으로 인해 캣우먼 후속편 제작 가능성까지 망쳐놓았다. 이딴놈 때문에 DC코믹스의 가장 매력적인 여성캐릭터를 스크린에서 다시 만나기 힘들어졌다니 그저 화가 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