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애니메이션

라비린스(Labyrinth, 1986)

 

 

초등학교 입학도 하기 전에 끝나버린 탓에 시대를 향유하진 못했지만, 80년대는 여러 모로 내가 좋아하는 시대다. 음악에선 기라성같은 밴드들이 매니아를 넘어 빌보드 1위를 호령하던 헤비메틀의 전성기였고, 영화에선 미지와의 조우(정확히는 70년대 끝이지만), ET, 듄, 블레이드 러너 등 SF 명작들과 코난으로 대표되는 마초 판타지 영화들이 우후죽순 개봉하던 시대였다. 그리고 또 하나, 인형 애니메이션 사상 최대 걸작이라 부를만한 다크 크리스탈, 미하엘 엔데 원작의 네버엔딩 스토리, 그리고 소개하려는 라비린스 같은 매우 흥미진진한 가족용 판타지 영화들도 많았던 시대. 마이너 취향의 나같은 사람들에겐 정말 멋진 시대 아닌가? (90년대 들어선 왠 일인지 헤비메틀, 판타지, SF가 모두 침체기에 빠져들었다가 90년대 말부터 부활해 2000년대엔 다시 중흥을 맞고 있다. 이 셋은 도대체 무슨 연관이냐?;;)

 

뭐 잡소리였고, 라비린스는 80~90년대 흥행의 보증수표 조지 루카스 제작, 다크 크리스탈(리뷰를 쓰고 싶은데 아쉽게도 네이버 영화엔 이 명작이 검색조차 안 된다. DB좀 확충하라고!!)과 세사미 스트리트의 감독이자 인형 애니메이션의 전설적인 인물 짐 핸슨 감독(아쉽게도 지금은 고인이 됐다), 당대의 카리스마 락스타 데이비드 보위(!!) 주연의 막강한 라인업에 16살의 풋풋한 제니퍼 코넬리가 첫 주연(!!!)을 따낸 작품이기도 하다.

 

줄거리를 살피면, 인형을 좋아하는 사라는 외출한 부모님 대신 시끄럽게 울어대는 동생 토비를 돌봐주기가 지겨워 동생을 고블린 왕국으로 데리고 가버리라고 주문을 외우는데, 뜻밖에도 진짜 고블린 왕국의 왕 자레드가 나타나 동생을 데려가버린다. 사라는 뒤늦게 후회하며 동생을 찾아 고블린 왕국으로 따라들어가지만, 끝없는 미로를 헤치고 동생을 되찾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단 13시간...뭐 이후 사라는 여러가지 고비를 맞으며 동료들을 맞고 결국 고블린 성에 도착해 자레드를 물리치고 동생을 되찾아 현실세계로 돌아온다는 전형적인 판타지 모험 세계의 진행공식에 충실하다.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 정말 감동한 두 가지는 개성넘치는 인물과 제작진의 엄청난 노력...

 

라비린스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라는 평가가 무색하지 않을만큼 외모나 성격 면에서 개성 강한 인물들이 다채롭게 등장한다. 인형 등 자기세계에 빠져지내고 울어대는 어린 동생을 귀찮아하는 아이에서 동생을 되찾기 위한 모험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사려깊은 성격으로 성장하는(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화내고 투덜거리는 솔직한 모습은 매력 만점) 주인공 사라, 고블린들의 왕이지만 지루한 일상에 지쳐 일탈을 꿈꾸고 사라에게 고백하기도 하는 다소 엉뚱한 성격의 미워할 수 없는 악당 자레드, 인형 캐릭터임에도 선역과 악역을 넘나들며 스토리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욕심많은 난쟁이 호글, 엄청난 덩치와 험상궂은 외모와 달리 순해빠졌지만 바위를 소환해내는 능력으로 후반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루도, 도무지 타협을 모르는 용감무쌍한 강아지 기사 디디무스 경, 그리고 비록 악역이지만 무섭다는 느낌보다는 재미있다는 느낌을 주는 자레드의 고블린 군단, 매우 웃기는 말하는 벽 등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대부분 인형캐릭터임에도)하나 하나 완벽한 퀄리티와 잊기 힘든, 그리고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오르게 하는 개성을 보여준다. 이 강력한 캐릭터성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흥미 있다.

 

두번째... 제작진들의 눈물겨운 노력... 만약 DVD를 구해 셔플먼트로 수록된 제작 다큐멘터리를 본다면 이 말이 정말 실감날 것이다.

 

사라, 자레드와 함께 라비린스 이야기의 중요한 축을 구성하는 캐릭터 중 하나는 난쟁이 캐릭터 호글이다. 이 영화는 86년작이며, 당연히 이 때에는 CG로 골룸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그렇다면 호글은 대체 어떻게 찍은 걸까? 그렇다. 호글은 인형이다. 아니, 저 거대한 얼굴이 복잡한 기계장치로 채워진 특수인형이라고 해야 하나? 호글 하나의 캐릭터를 움직이기 위해 무려 5명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이 영화를 위한 엄청난 노력을 드러내는 한 단면이다. 호글은 5명이 한 팀 - 호글 인형을 뒤집어쓰고 호글의 몸을 연기할 키 작은 사람 1, 호글의 눈동자 컨트롤 1, 호글의 안면근육 컨트롤 1, 호글의 입모양 컨트롤 1, 마직막으로 호글의 성우 - 이 되어야만 움직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뭔가를 하던 호글을 사라가 부르고 호글이 퉁명스럽게 "왜?"라고 되묻는 장면을 떠올려보라. 매우 간단한 장면이다. 그러나 호글이 이 연기를 하기 위해선 사라의 대사를 들은 호글인형을 쓴 사람이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사라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 순간 또 한명은 호글의 눈동자를 움직여 사라를 바라보게 만든다. 또 한명은 호글의 얼굴근육을 움직여 퉁명스러운 표정을 만들어내고, 또 한명은 호글의 입을 움직인다. 마지막으로 입모양에 맞춰 성우가 말한다. "왜?" 이 모든 작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타이밍에 이루어져야 한다. 놀랍게도 호글은 이런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만 움직을 수 있음에도 영화 속에선 주인공 사라 못지 않은 출연비중을 자랑하며 스크린을 휘젓는다.

 

자레드가 고블린 왕궁에서 춤추는 장면 또한 백미로 꼽을 만 하다. 고블린들의 흥겨운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무려 40여명의 인형 연기자들이 카메라에 잡히지 않도록 세트 곳곳에 숨어있어야 했다는 사실(숨을 공간을 만들기 위해 세트에 구멍을 너무 많이 뚫어 자칫 세트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을 영화 속에서 눈치챈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영화는 CG의 힘을 빌리지 않은 판타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아날로그 미학의 극한을 보여준 영화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하나, 풀 한포기조차 장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다. 제작다큐를 보면 의상 및 인형캐릭터 제작실의 방대한 규모가 거의 공장을 차려놓은 수준;; 영화 제작 다큐멘터리 보다가 이렇게 감동받긴 처음이었다;; 단언하건데, 반지의 제왕은 다시 만들 수 있지만 라비린스는 다시 못 만들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CG팀을 재구성하는 건 가능하지만 라비린스에 투입된 드림팀 수준의 스턴트맨, 인형연기자, 각종 소품 제작팀, 미술팀을 재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는 이런 막대한 노력을 데이비드 보위의 흥겨운 음악(보위는 주연과 더불어 영화를 위해 11곡을 직접 작곡하는 열의를 보였다)과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화려한 시각적 충격으로 핫껏 스크린을 수놓는다.

 

거대하고 괴기스러운(그러나 한편으로는 매우 코믹한) 세트, 자레드의 구슬신공, 고블린성의 화려한 파티, 사라가 자레드와 함께 한 꿈속의 무도회, 입이 안 다물어지게 하는 성문 로봇 등장씬(더구나 이 6m 짜리 거대로봇은 실제로 움직인다!!) 시끌벅적하고 코믹한 느낌의 후반 고블린성 대전투 등 수많은 장면들은 정말 판타스틱하다. 이 모든 장면이 CG가 아닌(뭐 선 지우기나 블루스크린 기법은 일부 장면에서 활용됐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말 꿈을 꾸는 느낌.

 

시종일관 유쾌한 영화다. 지금 기술로도 결코 재현하지 못할 아날로그 미학의 끝을 보여주는 환상적인 미술과 영상, 뮤지컬적 요소가 다분한 데이비드 보위의 글램락스러우면서도 유쾌한 음악, 개성만점의 캐릭터는 이 괴상망측하면서도 매우 유쾌한 판타지를 매우 현실감 있게 펼쳐낸다.

 

판타지 영화를 좋아한다면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