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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로보캅(RoboCop, 1987)

 

 

어릴 때는 그저 재밌는 블록버스터 액션물 정도로 생각했지만 요즘 보면 정말 의외다 싶을만큼 깊이가 있는 영화다. 개인적으로 로보캅의 세계관은 하나의 패러렐 월드로 구성되어도 손색이 없다 생각할만큼 정말 멋지다.

 

중추산업이던 자동차 산업(오죽하면 농구팀 이름이 피스톤즈겠는가)이 쇠퇴한 뒤 재정적자로 허덕이며 슬럼과 범죄의 온상으로 전락한 디트로이트의 지옥도는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여준 음울하고 지저분한 LA 풍경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재정적자를 견디다 못한 시는 대기업 OCP에게 치안권한의 상당부분을 이양하고 그 OCP에서 기존 경찰들을 대체할 새로운 슈퍼경찰로 로보캅을 탄생시킨다는 설정 역시 상당히 참신. 재정적자로 위기에 몰린 정부가 정부의 제1과제라 할만한 치안마저 대기업의 손에 넘긴다는 설정은 이제껏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미합중국 정부만세를 외치기 바쁘던 기존 블록버스터에 대한 시니컬한 조소에 가깝다. 자유와 민주주의의 천국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극한에 이른 대도시 디트로이트가 치안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 한낱 대기업에 놀아나는 꼬락서니라니...

 

그래도 공무원의 사명감으로 시민을 지키려는 경찰 측과 치안사업으로 이윤을 남기려는 OCP의 갈등 관계는 로보캅 세계의 매우 중요한 이야기 축이다. 1편에서는 월권과 범죄비호를 일삼는 OCP에 맞서 경찰노조가 파업을 결의하며, 2편에서는 OCP가 로보캅을 폭주하게 만들어 도시 치안을 악화시키고 그 기회를 틈타 디트로이트 시 자체를 인수해버리려는 음모를 꾸민다. 3편에서는 치안권을 상실하다시피 하고 OCP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경찰들이 배지를 내던지고 OCP와 시가전을 벌이는 상황으로까지 치닫는다. 이런 경찰과 OCP의 대립 속에서 경찰의 일원이지만 동시에 OCP의 "제작품"이기도 한 로보캅의 고뇌는 꽤 심각하다.(로보캅의 행동규칙 4조 : OCP 중역을 체포할 수 없다 - 3편에선 아예 OCP 직원을 쏠 수 없다로 바뀌는 듯 하지만 - 는 매우 재미있는 설정이다. 로보캅은 경찰로써 시민을 보호하고 범죄자를 체포할 의무를 지니지만 그 대상이 OCP인 이상 눈앞에서 살인극을 벌여도 손쓸 수 없는 한계를 지니는 것이다)

 

매우 어둡고 시니컬하지만 매력적인 세계관과 경찰과 OCP, 인간과 기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로보캅의 모습은 이 영화가 단지 폭력과 선정성에 기대는 B급 액션 블록버스터와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그러나 로보캅 1,2편은 폴 버호벤답게 매우 과도한 폭력과 선정성을 가진 영화다;;) 스타쉽 트루퍼스에서 전체주의와 군사주의를 미화하는 척 하며 시니컬하게 비꼬던 버호벤의 경향은 이미 그를 스타로 만든 로보캅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2편까지는 명작이지만 3편은 그저 그런 가족용 블록버스터였고 TV시리즈나 애니메이션은 매력적인 로보캅의 어두운 세계관을 살리지 못한 채 로보캅의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캐릭터를 앞세운 싸구려 영웅물로 전락했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아쉬움.

p.s. 로보캅에서는 곳곳에서 미국적 가치를 조롱하는 듯한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지극히 미국적인 슈퍼사이즈를 보여주는 "정통 미국차" SX-6000의 TV 광고나(이 차는 결국 경찰차에 박살난다) 로보캅이 사격 연습을 할 때 하필 타겟이 천진난만한 아기 사진이 붙여진 잼 병이라든지(미국 영화에서 개와 아이를 공격하는 것은 금기사항이다;;) 하는 장면들은 스토리와는 관련이 없지만 시니컬한 잔재미를 준다. 그 중 백미는 TV뉴스 장면인데, 미 정부에서 쏘아올린 위성 레이저포가 오발돼 1만 에이커의 삼림을 태우고 113명의 희생자(2명은 전직 대통령)를 냈다는 어이없는 소식이다. 언제나 공격받지 않을 것 같던 미국을 공격한 대상이 외부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미국 정부 자신이라는 건 꽤 뼈있는 개그다.(특히 최근을 생각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