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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City of Lost Children, 1995)

 

 

 

덩치는 크지만 어린아이인지도 몰라. 넌 작지만 아이가 아닌지도 모르고" - 작품 中 미에뜨 대사

밴드에 대해선 전혀 모르면서도 앨범재킷에 끌려 고르게 되는 음반이 있듯 영화의 내용이나 그런 건 전혀 모르면서도 단지 한 장면의 스틸컷만으로도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내게 그런 영화였다.

언제나 그렇지만 블록버스터에 길들여진 나같은 사람에게 유럽 영화는 좀 생소하다. 더구나 프랑스 영화, 그 중에서도 이런 판타지/SF 성향의 컬트 영화라면. 설상가상으로 컬트영화의 거장이자 괴짜감독으로 이름난 장 피에르 주네, 마크 카로가 감독을 맡은 영화 아니랄까봐 시종일관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한마디로 말해 참 접근하기 힘든 영화다;;

영화는 우선 이야기에 앞서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몽환적인 영상과 음악은 보는 사람들을 빨아들이기에 충분하다. 산업혁명 시기 영국의 뒷골목을 연상시키는, 소매치기와 강도, 부랑자가 널려있고 탁한 안개가 자욱하게 낀 때묻고 음습한 거리의 풍경 등은 그 움울한 느낌에도 불구하고 정말 매력적이다. 그리고 그에 대조되는, 녹색과 검푸른색의 바다 이미지...(그렇다고 깨끗하거나 시원한 느낌은 아니다. 시궁창과 다름없는 이 느낌은 갈색톤의 도시를 삼켜버리는 느낌마저 준다.) 내가 무슨 영화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고 미장센 등에 대해선 쥐뿔도 모르지만, 이 탁한 세피아톤과 검푸른색의 묘한 대비는 영화 내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음악 역시 길거리 연주자들이나 낡은 바에서 듣는 듯 싸구려틱한 느낌을 주면서도 상당히 매력적이다.

영화의 설정과 스토리는 진부하다면 진부하달 수도 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미친 과학자가 만들어낸 9명의 결함을 가진 인간 - 난쟁이 키의 절세미녀, 너무 닮아서 서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수면병에 걸린 6명의 아들들, 어항 속의 뇌 뿐인 친구, 그리고 꿈꾸지 못하는 천재소년 - , 꿈을 꾸지 못해 빨리 늙어버린 소년은 어린아이들의 꿈을 훔치기 위해 끝없이 아이들을 납치하려 하고, 맹인들은 외눈박이 기계눈을 얻기 위해 인신매매를 한다. 외눈박이들에게 동생(처럼 여기던 꼬마) 단레를 납치당한 차력사는 동생을 찾기 위해 소매치기 소녀와 길을 떠난다. 흔히 20XX년 핵전쟁으로 육지의 70%가 황폐화되어 어쩌구... 설정을 친절하게 설명하는 헐리우드 영화와 달리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는 이 탁한 디스토피아에 대해, 그리고 인물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가끔 암시가 주어지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분명치는 않다. 보는 사람이 생각하기 나름이랄까... 이 개방성과 불친절함이야말로 영화의 미덕이기도 하고.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영화의 스토리 라인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연출이다. 감독이 도미노 효과나 나비효과의 신봉자인 듯 작은 행동 하나가 전혀 예상치 못한 쪽으로 흘러가며 사건을 만들어내는 전개가 가끔 눈에 띈다. 특히 벼룩의 최면에 걸려 원이 미에뜨를 죽이려 할 때 미에뜨가 떨어뜨린 눈물 한 방울이 거미줄에 튀고, 그 눈물이 거미줄을 타고 떨어져 앵무새를 깨우고, 깨어난 앵무새의 울음소리가 개를 짖게 만드는 등 도미노 효과를 일으켜 결국 거대한 배가 부두에 충돌하고 그 때 울린 기적소리에 전직 작살잡이인 원이 정신을 차리게 되는 장면은 정말 굉장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또한, 평이한 스토리와 달리 인물들은 잊기 힘들만큼 강한 느낌을 준다. 고아들을 모아 소매치기를 시키는 삐쩍 마른 샴 쌍둥이 자매, 생화학 무기를 장착한 벼룩과 음악상자를 이용해 최면술을 부리는 소심한 아저씨, 구분할 수 없을만큼 꼭 닮은 6명의 쌍둥이, 기계눈을 이식한 그로테스크한 외모의 외눈박이들, 덩치는 크고 힘은 세지만 어린 아이의 정신을 가진 차력사 원, 그리고 어리고 순수하면서도 더없이 조숙한(어쩌면 영화 내의 등장인물 중 가장 성숙한지도) 소매치기 소녀 미에뜨... 영화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가 무너진 세계다. 어른들은 단순하거나 못된 꼬마에게나 봄직한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반면 아이들을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며 어른스럽다. 어른들은 성숙하지 못했고, 아이들은 때가 너무 많이 묻었다. 하지만 감독은 역시 미성숙한 어른들보다는 때묻고 영악하더라도 아직 순수성을 간직한 아이를 믿었나보다. 결국 모든 상황을 끝내고 단레를 구출하는 것은 (원의 도움을 받긴 하지만)어린 아이 미에뜨다. 귀여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어른스러운 대사를 툭툭 내뱉는 미에뜨는 개성있는 영화속 인물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존재다.

영화는 꿈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른과 아이에 대한 이야기다. 글 맨 처음에 있는 미에뜨의 대사처럼 꼭 덩치가 크다고 어른은 아니고, 덩치가 작다고 아이인 것은 아니다. 곰같은 외모지만 아이처럼 순수한 원이나 순해빠진 6명의 쌍둥이는 덩치가 클 뿐 영락없는 아이다. 반대로 덩치가 작지만 아이가 아닌 것은 그 말을 한 미에뜨 자신에게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꿈과 현실,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한껏 흩뜨려놓던 영화는 결국 꿈꾸지도 성숙하지도 못한 어른들은 죽고 아이의 순수성을 가진 어른과 진짜 아이는 살아남는 것으로 해피 엔딩을 맺는다. 시종일관 탁한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면서도 이 영화가 동화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p.s. 샴 쌍둥이 역을 맡은 배우 둘은 헤어스타일과 메이크업의 힘이라지만 정말 워낙 닮아서(요리 장면에선 팔 두께, 손까지 똑같음!) 실제 쌍둥이인줄 알았는데 크레딧 보니까 성이 다르군요;; 다른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닮을 수 있나 놀랐습니다.

p.s. 2. 배우 중 한명인 도미니크 씨는 6명의 쌍둥이+쌍둥이를 만들어낸 미친 과학자까지 무려 1인 7역을 소화. CG의 힘인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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