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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다크 시티(Dark City, 1998)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명작이다. 설정의 독창성과 스타일리시한 영상, 진지한 주제 등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흥행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채 쉽게 잊혀졌고 매니악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조만간 "저주받은 걸작" 명단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순전히 트루먼쇼와 매트릭스 때문... "당신의 기억과 삶은 만들어진 것일지 모른다"는 의문은 매우 독창적이었지만, 우연의 일치로 약간 먼저 개봉한 트루먼쇼의 "당신의 삶은 만들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의문과 겹쳐지며 독창성을 상당부분 잃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몇달 뒤에 개봉한 매트릭스의 거대한 그늘(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매트릭스의 아류작이라 말할 것이다. 실은 그 반대인데...-_- 뭐 매트릭스는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등 다각적인 영향을 받은 짬뽕이라 다크시티만의 아류작이라 보기도 어렵지만;;)은 이 영화를 그림자 저 편 어둠 속으로 묻어버렸다. 뭐 애초에 비교적 덜 알려진 배우, 어두운 세계관 때문에 큰 흥행은 기대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지만 적어도 트루먼쇼보다 먼저 개봉했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작품이 되었으리라 확신... 방향이 확연히 다름에도 유사한 개봉시기, 유사한 설정 때문에 듣게 된 "트루먼쇼의 어두운 SF버전"이란 평가는 참 억울한 악평이다.

 

이 영화는 일단 분위기가 멋지다. 해가 뜨지 않는 도시... 아무도 낮에 뭘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도시... 아침이 찾아오지 않는 암흑속의 도시(말 그대로 다크시티다)의 음습한 풍경,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검은 정장의 "이방인"들 등 이 영화는 제목만큼이나 어둡다.(이 전반적인 어두움 때문에 마지막 장면의 환함이 더욱 빛나보이는 게 아닐까?)  여기에 기억을 잃고 이방인들에게 쫓기며 진실을 파헤쳐가는 주인공의 모습 또한 여느 스릴러 못지 않게 긴장감이 있다.(뭐 영화에선 일찌감치 답을 알려주는 탓에 "우리가 아는 걸 주인공은 모르는" 상황이 약간 김빠지기도 하지만)

 

이 영화의 두번째 미덕은 스타일리시한 영상... 특히 음울한 느낌의 도시 풍경이나 매일밤 자정 이방인들이 튜닝으로 도시를 재구성하는 모습은 상당한 시각적 충격을 준다. 영화의 스타일에 반해 감독이 누군가 찾아봤더니 알렉스 프로야스... 역시 음울하고 스타일리시한 멋진 영화였던 "크로우"의 감독이었다. 후반 외계인 대장과 주인공의 대결이 좀 낯간지러운 면도 있지만, 매트릭스의 후반 네오 쇼타임에 비하면 충분히 봐줄만 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 주인공이 튜닝능력으로 도시에 해를 되찾고 바다를 만드는 장면과 작품 내내 음침하게 달라붙던 어둠이 싹 걷힌 밝은 태양 아래 제니퍼 코넬리가 눈부시게 미소짓는 장면이 주는 강한 임팩트는 낯간지러움 따위 우주 저편으로 날려버린다.

 

세번째... 트루먼쇼와 매트릭스 때문에 많이 퇴색됐지만 이 영화의 설정은 상당히 독창적이었다. "나"는 사실 내가 아니라는 믿기 힘든 사실... 이 도시는 거대한 실험실에 불과하고 나는 매일 새로운 기억이 주입된 채 조작된 삶을 살아가는, 이방인의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했다는 설정은 상당히 멋지다. 특히 후반 쉘비치로 통하는 벽을 부수는 순간 빈 허공만이 드러나는 장면, 이 도시가 행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실은 우주 공간에 떠있는 커다란 스테이션이었다는 전모가 드러나는 장면은 꽤 놀라움으로 다가온다.(트루먼쇼와 매트릭스를 먼저봤다면 아쉽게도 이 놀라움은 반감되겠지만;;)

 

마지막으로 이 영화의 주제 역시 나름대로 신선했다. 이방인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기억을 뒤섞어놓고 연구를 거듭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주인공은 말한다.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에 있다고... 인간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은 오랜 시간 신학, SF의 화두였다. 개중에는 영혼이라 말한 이도 있고, 개중에는 이성이라 말한 이도 있고, 개중에는 기억이라 말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내린 결론은 감정이다. 인간의 기억을 주입한 이방인이 인간이 될 수 없었던 것은 기억 때문이 아니었다. 기억을 느끼고 이해할 감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