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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 2004)

 

 

실연의 상처로 아파하는 당신에게 애인의 기억만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한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시에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꿈같은 일이라는 생각 역시 해봤을 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이 매우 비현실적인 가정에서 출발한다는 데서 매력이 있다.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따분한 남자와 가볍고 충동적이지만 자유로운 여자가 사랑에 빠진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성격 차이 때문에 끊임없이 상처를 주던 둘은 결국 발렌타인 데이를 얼마 안 남기고 크게 싸우게 된다. 발렌타인 3일 전 남자는 여자에게 사과하기 위해 찾아가지만, 여자는 남자를 전혀 모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곁에는 새로운 남자까지 있다. 여자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당혹스러워하던 남자... 그는 라크로라는 병원에서 여자가 자신과 관계된 모든 기억을 지웠다는 것을 알게 된다. 슬퍼하고 또 분노하던 남자는 자신도 라크로에 가서 여자의 기억을 지워버리기로 마음먹는다.

 

대충 이 영화의 줄거리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아마 남자가 여자의 기억을 지우는 것을 포기하고 그녀의 기억을 돌려놓기 위해 노력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터널 선샤인은 그 평범함을 거부한다는데 가치가 있다.

 

기억을 지우기 직전, 여자에 관해 말해보라는 박사의 말에 남자가 쏟아내는 말은 온통 악담으로 가득차있다. 지적이지 않고 말버릇은 더 가관이고 변덕스럽고 아무 남자하고나 자고... 하지만 여자는 정말 그런 사람이었을까? 남자가 잠든 사이 여자에 관한 기억은 하나씩 지워진다. 이 영화는 자신의 지워져가는 기억속을 헤메는 남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여자에 대한 기억은 점점 사라져간다. 최근의 기억부터 처음 만났을 때까지... 이상한 것은 기억이 지워져갈수록 여자의 아름다운 모습만이 남는다는 거다. 마침내 남자는 그녀를 기억에서 지우는 일을 중단하고 싶어하지만, 그는 이미 잠든 상태고 깨어나 중단해달라고 알릴 수 없다.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여자를 남기기 위해 벌이는 남자의 노력은 영화에서 매우 인상 깊은 부분이자, 사랑에 관한 우화다. 남자는 말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항상 자신의 감정을 노트에 끄적이지만, 그것조차 여자에게 보여주는 일은 결코 없다. 그는 내성적이고, 소심하며 매우 지루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기억에서 지워져가는 여자를 남기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 부끄러운 과거 등 매우 은밀하고 사적인 기억 속으로 그녀를 불러들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남자의 변화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점점 지워져가고 결국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만이 남는다.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마저 부서져가는 가운데, 그녀를 다른 기억에 숨길 수 없음을 깨달은 남자는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을 즐기기로 한다. 그리고 말도 없이 떠나버렸던 원래의 기억 대신, 다시 돌아가 여자와 작별의 키스를 한다. 그리고 여자는 말한다. "몬톡에서 만나"

 

이 영화는 플래시백 구성을 취한다. 남자와 여자가 우연히 만나고 알콩달콩 분위기로 흐르던 거의 영화시작 20분 후, 갑자기 배우소개가 뜨고 남자가 울며 운전하는 모습이 나오자 난 순간 비디오테이프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영화 후반부, 맨 처음 장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만났던 것이 첫번째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 만남 역시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지워진 그녀가 남긴 "몬톡에서 만나"란 한마디가 남자를 이끌어 직장도 땡땡이친 채 몬톡으로 충동적인 길을 떠나게 만들고 그곳에서 그녀와 두번째(그러나 첫번째) 만남을 이끌어낸 것임을 깨닫게 될 때의 느낌은 로맨스 영화에서 좀처럼 느끼기 힘든, 뒤통수를 한방 내리치는 반전이다.

 

만약 전형적인 헐리우드식 엔딩 -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다시 만난 남자와 여자가 두번째 사랑에 빠지는 것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면, 이 영화는 달콤하긴 하지만 특별한 영화가 되진 못했을 거다. 그러나 영화는 또 한번의 반전을 준비한다. 라쿠나에서 회의를 느낀 직원이 차트를 시술자들에게 돌려보내고,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이 서로 기억에서 지워버린 존재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기 직전 박사에게 털어놓았던 서로에 대한 그 수많은 악담들... 이제 남자와 여자는 자신들이 한번 실패했던 사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서로에 대해 얼마나 많은 불만을 가졌고 얼마나 나쁜 생각들을 했었는지도 안다. 그럼에도 그들은 말한다. 괜찮다고... 만약 영화가 헐리우드 엔딩으로 끝났다면 난 비웃었을 것이다. 저 둘은 저렇게 서로 기억하지 못하며 만났다가 또 싸우고 또 똑같이 깨질 거라고...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이제 실연의 아픔을, 그리고 상대에 대한 불만을 받아들을만큼 성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려는 사랑이기에 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영화의 또다른 놀라운 점은 배우에 대한 발견. 바로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이다.

 

TV 코미디 프로로 출발해 에이스 벤츄라, 마스크로 스타가 된 짐 캐리. 그의 전매특허라면 역시 슬랩스틱 수준의 과장된 몸짓과 그 어떤 SFX도 따라할 수 없는 안면근육 연기다. 참을 수 없을만큼 과장되고 유쾌한 코미디를 선보이던 그였지만, 이 영화에선 180도 다른 모습을 아주 훌륭하게 소화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의 꺼끌한 수염과 덥수룩한 머리의 다소 초췌한 모습, 소심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이 배우가 과연 우리가 알던 그 짐 캐리인가 의심될 정도로 멜랑콜리한 느낌을 준다. 다른 영화에선 요란하게 느껴지던 그의 뚜렷한(아니, 너무 뚜렷한) 이목구비와 그의 긴 손가락마저 내성적이고 섬세한 캐릭터의 성격이 살아나는 느낌. 에이스 벤추라나 마스크는 짐 캐리에게 막대한 성공을 가져다줬지만 그를 가볍고 요란한 캐릭터라는 틀에 가두어버렸다. 요란한 쇼맨십 뿐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연기력을 갖추고 맨 온 더 문 등에서는 코미디가 아닌 정통연기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음에도 관객들 머릿속에 너무나 확고히 고정되어버린 과장된 캐릭터의 고정관념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던 짐 캐리지만, 이 영화에선 완벽한 분위기 변신에 성공하며 코미디가 아닌 정통 연기에서의 자신의 가치를 유감없이 증명했다. 트루먼 쇼 이후 맨 온 더 문, 마제스틱, 이터널 선샤인 등 정극과 그린치, 브루스 올 마이티, 레모니 스니켓의 위험한 대결 등 희극을 오가는 짐캐리의 미래를 더욱 밝힌 작품.

 

케이트 윈슬렛은 역시 타이타닉의 대성공 이후 관객의 머릿속에 너무 깊게 각인된 캐릭터 때문에 슬럼프에 빠진 모습이었지만, 이 영화로 멋지게 부활했다. 빨간색, 녹색, 파란색 등 강렬한 원색의 머리 염색과 패션 감각으로 변덕스럽고 자유로운 클레멘타인의 캐릭터에 아주 잘 어울리는 느낌. 타이타닉에서 그저 예뻤던 거라면 이 영화에선 정말 사랑하고 싶다.

 

배우도, 구성도, 영상도(특히 기억이 지워져갈 때 붕괴되는 모습이나 얼굴이 사라지는 모습), 주제도... 모두 (조엘 식으로 표현하면)"Nice"하다. 사랑에 관한 특별하고 아름다운 영화.

 

p.s. 더불어 음악도 정말 좋다. 특히 Beck의 Everybody gotta learn sometimes는 항상 꽂히는 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