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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애니메이션

아이언 스카이(Iron Sky, 2012)

 

 

2차세계대전에서 만약 나치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사실 달 뒷편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발견한 차세대 에너지원 헬륨-3를 이용해 기지를 세우고 군대를 재정비하며 다시 지구를 침공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아이언 스카이는 꽤 흥미있는 음모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이후의 진행이다. 만약 이 영화가 헐리웃에서 만들어졌다면, 자유와 정의의 수호자 미국을 필두로 한 세계 연합군이 사악한 나치에 맞서 지구를 지키는 영웅담이 펼쳐졌을 것이다. 어쩌면 대통령이 직접 전투기를 몰고 나가 나치의 거대한 우주선에 최후의 한방을 먹였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영화는 미국영화가 아니다. 핀란드,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등이 합작한 다국적 영화에 감독은 헤비메틀 밴드 출신에 스타트랙 패러디 비디오로 명성을 얻은 괴짜라고 한다. 뭔가 재미있고 색다른 물건이 나올듯한 조합이지 않나? 예고편만 봤을 때 이 영화는 CG와 대규모 물량을 앞세운 전형적인 싸구려 SF 액션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 블록버스터도, 뻔한 줄거리의 CG 액션도 아니라는 게 반전...

 

이 영화는 사실 SF를 빙자한 매우 정치적인 블랙코미디, 그것도 상당부분 미국을 비꼬는(!) 블랙 코미디 영화이다. 50년만에 다시 달에 유인 우주선을 보내는데 그 중 하나가 흑인이니 재선에 도움이 될 거란 미국 대통령의 말이나 흑인이던 주인공을 금발에 흰 피부로 바꿔놓고는 "열등한 흑인을 아리아인으로 만들어줬으니 감사해야지" 따위를 지껄이는 장면에서는 인종차별 문제를 쑤셔대며, 지구의 컴퓨터 기술을 얻기 위해(달에 기지까지 세우고 우주선을 건조하는 나치지만 컴퓨터기술은 여전히 2차세계대전 수준;;) 지구에 침투한 나치가 엉뚱하게도 미국 대통령의 선거 켐페인에 합류해 연설로 대중을 휘어잡는 장면에선 대중의 우매함을 꼬집는다. 작중 최고의 캐릭터는 멍청함과 뻔뻔함, 무개념을 두루 갖춘 미국 대통령인데 대사 한마디 한마디가 실로 주옥같다. 가끔씩은 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은근히 비꼬며 찌르는 멋이 있어야 풍자인데 너무 대놓고 비판하다보니 도리어 유머러스하지 못하고 유치해보이는 부분도 있다) 그녀(작중 대통령은 여자다)의 신랄하고 뻔뻔한 셀프 디스는 정말로 시원하다.(미국은 원래 약속을 안 지켜! 그게 우리가 하는 일이지! 그래서 뭘 어쩌라고? 이런 식이다)

 

어쨌든 재미있는 영화다. 비록 저예산 영화지만 CG도 수준급이며 액션 장면도 꽤 괜찮은 편이다. 캐릭터도 분명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다.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나 지옥의 묵시록 등의 패러디 혹은 오마주 장면도 곳곳에서 튀어나와 예상치 못했던 즐거움을 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미친듯이 신랄하다. 뭐 워낙 자유주의적인 미국이라(아무리 미국이 진정한 악의 축이네 뭐네 해도 자국 대통령을 대놓고 디스하고 음모론을 제기하는 화씨 911같은 영화도 아무 문제 없이 스크린에 걸릴 수 있는 그 자유주의적 토양만큼은 매우 부럽다) 자국에서도 스스로를 까는 영화가 나오지만, 이 영화는 미국 외부에서 만든 영화이기 때문에 더욱 사정없이 미국을 공격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불편할지 모르겠지만 외부인 입장인 우리가 보기에는 정말 통렬하다. 범상치 않은 시작부터 실로 아름다운 마지막 장면까지(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 대한 오마주 중 최고가 아닐까 싶음) 시종일관 유쾌하지만 결코 가볍지는 않다. 그냥 가볍게 시간이나 때우려고 찾아봤다가 반해버린 영화.